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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의 입으로만 평가되던 예술영화는 가라. 2월에 아카데미를 노린 대작 영화들의 개봉으로 극장가를 쫓아다니는 즐거움이 가득했다면, 상대적 비수기인 3월은 다양한 나라의 예술영화가 꽃피는 시기다. 지루하고 어렵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예술영화는 작가주의 감독들의 독특한 색깔에 대중성이 가미되면서 좀 더 젊어지고 즐거워졌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돈 세느라 여념이 없던 시간에 파리만 날렸던 예술영화 전용관들도 모처럼 맞은 시즌에 손님 맞을 채비가 한창이다. 기후 이상으로 꽃피는 봄을 만끽하기엔 아직 이른 요즘,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봄나들이 가보는 건 어떨까.
* 지루하지 않은 사랑, 청춘의 에피소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황제>를 만든 영화계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은 화면 가득한 노출신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무삭제 상영만으로도 화제에 오른 작품이다. 한몸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쌍둥이 이자벨과 테오는 미국에서 온 유학생 메튜와 어울려 부모님이 휴가를 떠난 집에서 그들만의 몽환적인 세계에 빠져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공통적 취향인 영화를 소재로 서로 소통하고, 시험하며, 자유정신이 표출되기 시작한 어지러운 1960년대 후반의 프랑스 사회를 살아나간다. 주인공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상관없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서로에게 취해 있다. 음악, 정치, 철학을 얘기하며 자신들이 가진 가치관과 문화적 취향을 열정적으로 뿜어내는 스무 살 청춘임을 과시한다. 전라의 세 주인공이 좁은 욕조 속에 함께 몸을 담그고 나른하게 누워 있는 장면은 최근의 한 의류 브랜드 광고를 떠올리게 하지만, 거장의 앵글은 삼면 거울을 통해 주인공들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세 사람의 자유로운 관계와 사랑을 보여주는 한편, 이것이 성장 단계의 일장춘몽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몽상가들>의 엔딩곡은 에디트 피아프의 ‘아뇨,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귀에 익숙한 이 곡은 시대정신과 젊은 세 주인공의 아름다움과 열정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현실과 영화가 겹치면서 청춘의 미몽을 그린 <몽상가들>은 신선한 에로티시즘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캐스팅 배우들의 아름다운 육체와 표정이 살아 있고, 특히 극중 비너스 흉내를 내는 이자벨 역의 에바 그린의 고혹적인 모습은 영화를 이끄는 힘이 된다.
여기 또 한 편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넘치지만 그 무엇도 사랑의 무게와 존재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다. 사랑은 시작과 끝이 모호하며,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랑은 늘 가벼운 깃털처럼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유리처럼 툭 치면 산산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2003년 깐느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덴마크 영화 <리컨스트럭션>은 대담한 카메라워크로 신선한 영상을 통해 또다시 사랑을 이야기한다. 코펜하겐의 24시간을 통해 사랑에 빠지는 들뜬 기분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사이를 맴돌며 연인들이 느끼는 미세한 감정을 포착해 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서로를 알아본 스물아홉의 포토그래퍼 알렉스와 그를 사로잡은 아메. 소설가인 남편의 출판기념 행사차 코펜하겐을 방문 중인 아메에 이끌린 알렉스는 배웅하던 애인을 홀로 남겨둔 채 아메의 뒤를 따른다. 카페에서 첫 인사를 나누고 이내 격정에 휩싸인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또 다른 카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다음날 아침 알렉스는 가족, 집, 애인,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에 휩싸인다. 약속 장소로 달려간 알렉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던 아메는 그를 알아봐줄까?
실험적인 영상이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특히 열정에 휩싸인 연인의 모습은 과감한 클로즈업들로 표현되어 대사나 내러티브에 의존하지 않고도 감정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세련된 이미지와 음악이 사랑에 대한 고찰을 도와준다.
상큼하고 발랄한 <아멜리에>의 오드리 토투가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인게이지먼트>는 쟝 삐에르 주네 감독 마니아들에게 반가운 영화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와 당시의 의상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차가운 모노톤의 서정적인 영상은 감독의 상상력과 더불어 즐거움을 선사한다.
* 음악과 영상이 어울린 시화 같은 영화
연인들의 안타깝거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라면 천사들의 합창이라고 여겨질 만큼 멋진 선율을 들려주는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추천한다. <코러스>는 음악가로서 실패한 한 교사가 작은 기숙사 학교의 문제아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면서 화합과 희망을 찾게 해주는 내용의 감동 드라마. 실패한 작곡가와 꿈을 잃은 아이들이 함께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꽃을 피우는 이 영화는 웃음과 감동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프랑스 전역을 돌며 발굴해 낸 20여명의 합창단 소년들이 들려주는 영화 속 음악들은 이미 각종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거나 OST 앨범 판매량으로 인정받고 있다.
새로운 영상미학을 보여주는 터키 영화 <우작>은 두 남자의 동거를 통해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공했지만 젊은 시절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우울하고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마흐무트와, 순수하지만 대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딘지 불안한 청년 유스프, 이 둘의 동거를 통해 인간의 치졸한 단면을 드러낸다. 극중 사진작가인 마흐무트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스탄불의 풍경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 희망이자 절망이 된 가족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삶을 이겨낸 위대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가슴 아픈 인생, 그 삶의 비극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낭만적인 평화주의자 한스와 결혼해 아름다운 신혼생활을 누리는 리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한스는 나치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쟁터로 강제징집을 당하고, 리네는 전장 속에 홀로 남아 옆집에 폭탄이 떨어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어렵게 딸 한나를 출산한다. 추위와 굶주림, 강간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한스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던 리네에게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한스는 속물로 변해 있고, 리네의 얼굴은 고통으로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뉴 저먼 시네마의 최고의 여성감독, 헬마 잔더스-브람스 감독과 그의 어머니의 실제 일화를 토대로 만들었으며 내레이션 역시 감독이 맡았다. 딸이 직접 말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며 가슴속에 더 깊은 울림을 전달해 준다.
제일 한국인 출신의 영화감독 최양일이 만들고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한 영화 <피와 뼈>도 가족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서 <독일, 창백한 어머니>와 비교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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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영화의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2002년에 만든 <스파이더>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주인공 스파이더의 거미줄 같은 기억의 미로 속을 따라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가족 이야기가 펼쳐진다.
* 영화상 수상으로 빛을 더한 작품들
<어바웃 슈미트>에서 미국 중산층의 교양과 도덕성을 파헤치며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던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알렉산더 페인이 <사이드웨이>를 통해 돌아왔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두 명의 평범한 중년 남자의 사랑과 우정, 외로움과 꿈을 엉뚱한 와인 탐험으로 보여주면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전미 주요 영화비평가협회의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은 물론, 2005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와인산지의 풍경과 와인,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화를 한층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아무도 모른다>는 아버지가 다른 네 아이가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빈 집에 갖혀 자신들끼리 보내는 가장 슬픈 1년 동안의 시간을 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슬프고도 가련한 아이들의 세계를 담담히 바라본다. 동생들을 이끄는 듬직한 첫째, 아키라 역을 맡은 야기라 유야는 2004 칸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 지나간 예술영화 다시 보기
예술영화 전용관 뤼미에르에서는 오는 24일까지 ‘2004 한국예술영화 다시 보기’를 통해 예술영화를 보다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색깔 있는 감독들의 영화 <빈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인어공주>, <아는 여자>, <거미숲> 총 5편이 상영된다. <영매>, <송환>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지속적으로 소개해 온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2005년 특별 연간 기획 프로그램으로 다큐멘터리로 보는 영화 세상 ‘다큐 IN 나다’를 통해 정수연 감독의 <봄이 오면>과 류미례 감독의 <엄마…>를 선보인다. 이 두 작품은 여성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사전제작지원(옥랑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가족 안의 여성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들이다.
창사 10주년을 맞는 영화사 백두대간 역시 예술영화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인 ‘10년 만의 외출’을 주제로 <노스텔지아>, <희생>을 재상영한다. 또, 국제영화제의 산실로 떠오른 부산에서도 주옥 같은 고전영화 16편이 상영된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기획영상제로 ‘영화사의 위대한 영화유산-월드시네마 Ⅱ’를 통해 <선라이즈>, <라쇼몽>,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을 18일부터 4월7일까지 선보인다. 바야흐로 3월 한 달은 예술영화의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김미영/ 자유기고가 instyle@hani.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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