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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1 09:21 수정 : 2019.06.01 09:24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언덕 중간의 집’

세 살배기 딸 육아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전업주부 야마자키 리사코(시바사키 고)는 한 형사사건의 보충 재판원으로 선정된다. 2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영유아 학대 살인사건에 관한 재판이었다. 피고인은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딸을 학대하고 욕조에 빠트려 살해한 죄로 체포된 안도 미즈호. 온 세상이 잔혹한 악마라 떠들던 여자의 얼굴은 의외로 평범했다. 어린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안도 미즈호에게 혐오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던 리사코는, 그러나 재판이 진행될수록 서서히 그녀의 상황 위에 자신의 삶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일본 와우와우(WOWOW) 채널의 2분기 드라마 <언덕 중간의 집>은 베스트셀러 작가 가쿠타 미쓰요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친엄마가 어린 딸을 죽인 잔혹한 사건을 소재로 한 법정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치열한 추리나 놀라운 반전과는 거리가 멀다. 보충 재판원이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재판에 참여하게 된 한 여성의 시선과 내면의 변화를 따라가는 이 드라마는, 충격적인 사건 뒤에 가려져 있던 미세한 적의와 폭력을 초미세 현미경으로 포착해내는 극도로 섬세한 심리 서스펜스다.

극 중에서 안도 미즈호를 향한 리사코의 최초 입장은 한결같이 그녀가 ‘엄마의 자격이 없다’고 외치던 세상과 다름없는 심판자의 태도였다. 1차 공판에서 돌아온 리사코는 남편에게 말한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죽이다니. 그 사람한테 과연 모성이라는 게 있기는 했을까.” 하지만 리사코의 이런 생각은 2차 공판에서 안도 미즈호의 남편이 증언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흔들린다. 그가 아내를 대놓고 학대했다거나 외도했다거나 하는 구제 불능의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그의 문제는 오히려 평소의 ‘악의 없는’ 말과 행동에서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아내가 피곤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기를 낳으면 몇개월 동안은 누구나 그렇다고 들었고, 그래도 도와주고 싶어서 어머니께 와달라 부탁드렸다”는 말이나, “모두가 겪는 일이니까 당신도 할 수 있을 거야, 힘내”라고 말했다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육아의 고통을 이해는 하지만 육아 당사자로서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남편의 태도는, 주양육자로서 온전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만이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분노와 설움을 유발한다. 재판원 중 누군가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라고 그를 동정하지만, 리사코는 그의 모습 위에, 평상시에는 한없이 자상한 자기 남편의 일면이 순간적으로 겹치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안도 미즈호의 재판은, 대부분 평화로운 일상과 대체로 행복한 가정 안에 공기처럼 잔잔하게 스며들어 있는 여성 억압의 다양한 기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안도 미즈호가 아이를 내려놓기 직전 이미 욕조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던 물처럼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분노와 소외감과 슬픔이 이야기 전체에 세차게 출렁인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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