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05 19:22
수정 : 2019.07.05 19:45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2012년 제네바, 유명 사립은행 그랑지에의 의장 폴 그랑지에가 급작스레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그랑지에 가문과 연을 끊었던 폴의 누나 엘리자베트는 동생의 소식에 집으로 돌아오고, 폴이 미리 그녀에게 은행 운영을 위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기 의장을 노렸던 폴의 형 알렉스는 엘리자베트의 귀환을 불편하게 여기고, 엘리자베트는 폴이 쓰러지던 날 밤의 수상한 알렉스의 행적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폴의 사고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트가 발견한 것은 그랑지에 가문이 오랫동안 은폐해온 추악한 비밀이었다.
2017년 방영된 <머니킹>(Quartier des Banques)은 스위스 사립은행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드라마 시리즈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세계 최고의 보안시스템을 자랑하는 스위스 은행은 그 철저한 보안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진 존재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국고를 채우기 위해 탈세범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세피난처로 유명했던 스위스 은행의 철통 보안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머니킹>은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의 중심 배경인 그랑지에 사립은행은 그랑지에 가문이 경영하는 가족기업으로 3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은행이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의장직을 맡았던 폴은 가문의 장남인 알렉스를 제치고 후계자로 인정받았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은행가였다. 그러나 미국의 집요한 계좌 추적을 피해 새로운 조세피난처를 마련해야 했던 대형 고객들이 차례로 거래를 끊자 폴은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탐욕스럽고 차가운 가문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폴을 애틋하게 여겼던 엘리자베트는 그가 그동안 은행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저질러온 비리와 가족의 비밀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머니킹>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랑지에 가문의 어두운 역사를 통해 스위스 은행의 그늘을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들의 위기는 외부 환경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깊숙한 내부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난다. 은행 명문가의 오랜 전통에 대한 그랑지에 가족의 자부심이 실은 허상에 불과했다는 냉소와 철통 보안으로 고객의 신뢰를 받던 스위스 은행의 명성이 실은 탈세범들의 비밀 금고 구실을 통해 쌓아 올린 것이었다는 비판이 겹쳐지면서, 드라마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스위스 금융 산업에 대한 자성으로 확대된다.
<머니킹>은 장르적으로도 꽤 신선한 작품이다. 폴의 비밀을 추적하려는 엘리자베트의 시도가 가족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완벽 보안 체계의 장벽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스위스 은행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희소한 소재와 장르적 재미, 그리고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어우러지면서 드라마 자체가 희귀한 스위스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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