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3 07:10
수정 : 2019.07.25 18:32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35)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감독 홍상수(1996년)
아무도 거기에 가본 적이 없는데 홍상수는 이미 여기에 도착해버렸다. 이 난처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어느 봄날 한국영화 앞에 우두커니 혼자 나타났을 때 모두들 이걸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어리둥절해하며 그저 쳐다보았다. 시작하면 신경질적인 현악기의 선율이 짜증스럽게 같은 악보를 제자리에서 반복하는 것처럼 들려올 때 불길한 긴장이 스며 나오는 것만 같았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줄거리를 요약해보려고 애를 쓸수록 헛된 노력은 우스꽝스러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말하자면…) 옥탑방에 살고 있는 소설가 효섭은 그를 짝사랑하는 극장 매표원 민재를 만나 원고 교정을 부탁한다. 그런 다음 유부녀 보경을 만나서 여관방에서 섹스를 한다. 보경의 남편 동우는 지방에 출장을 다니면서 다방 아가씨를 불러 섹스를 하고 성병에 걸리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내내 보경에 대한 의처증에 시달린다. 민재를 짝사랑하는 동우는 민재 주변을 맴돌다가 섹스를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상하게 갑자기 끝난다.
누군가는 이걸 일상성의 리얼리티라고 설명했다, 바보 같은 설명이다. 더 바보는 이걸 ‘찌질한’ 연애 이야기의 풍속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모더니즘의 도래라고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어지는 차이와 반복의 무한한 연장이라고 덧붙인 평도 읽었다. 헛소리이다. 홍상수는 그런 개념 바깥으로 영화를 끌고 나왔다. 그런 다음 이야기의 중심을 텅 빈 채로 놓아두고 주변만을 계속 맴돌면서 블랙홀 안으로 빠져드는 어떤 위기의 상태를 목격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여기서 본 것은 매일 만나는 생활 앞에서 이게 뭐지, 라는 낯선 광경이었다. 이때 그 광경은 실재일까, 꿈결일까. 아니면 표면일까, 심연일까. 아니면 갇혀버린 질서일까,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카오스일까, 아니면 또는, 아니면 또는, 의 무한반복. 홍상수는 아니면 또는,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내기를 한다. 그리고 홍상수는 이 내기에서 점점 더 능수능란해졌다. 나는 이 내기에서 이겼다는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정성일/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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