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 역을 맡은 최덕문(왼쪽)씨는 지팡이를 쥐자마자 정씨 할아범으로 배역 이동한다. 진구가 또 다른 일곱 배역, 갑택이 여덟 역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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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풍자극 ‘주머니 속의 돌’
“사투리가 머 저렀나”(진구) “딴 영화에서도 강원도 사투리 다 저래하잖아. 서울 사램들은 우리가 맨날 ‘그랬드래요’ ‘아니드래요’ 이린 것만 하고 사는 줄 알기야. 내가 진짜 영화가 뭔지 확실히 보여주겠어.난 내 영화르 만들거거든.”(갑택) 영화인 꿈꾸는 변두리 인생
분장 변화·암전 한번 없이, 소품만 바꾸면서 다역 변신 32살 청년 갑택과 진구. 강원도 출신의 단역 배우다. 만년 변두리 인생에서 벗어나 영화인으로 화려하게 성공하겠다는 꿈이 있다. 허영이라 불러도 좋다. 감자밖에 없는 자와 감자만 없는 이들 사이 시각차는 어차피 존재한다. 코믹 풍자극 <주머니 속의 돌>이다. 익숙지 못한 정선 사투리가 걸다. 좀 따라잡나 싶으니까 갑택이 갑자기 영화판 조감독으로 바뀐다. 진구도 스태프인 양혜수가 된다. 그렇다, 1인 다역이다. 배우는 딱 둘이다. 배역은 모두 열일곱. 흔한 암전 한번 없다. 새 분장도 없다. 배우는 절대 무대 밖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관객이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봐주는 한. 다음달 1일부터 10월30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관객을 ‘웃음’ 또는 ‘쓸쓸함’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참이다. 제 이름 석자를 새긴 전작 <대한민국 김철식>을 걸고 내지르는 박철민(갑택 역)씨의 흰소리가 밉지 않다. “앞으로 20년 동안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작품이에요. 엄청나게 웃기거든요. 그러다가 끝엔 잔잔함, 쓸쓸함이 배는 거예요.”
최덕문씨는 박철민씨, 서현철씨는 홍성춘씨와 짝을 이뤄 더블캐스팅됐다(왼쪽부터). 서씨는 연출을 맡은 박혜선(맨 오른쪽)씨와 작품 번안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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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동숭아트센터 연습실은 영화가 촬영되고 있는 강원도 남부의 보잘 것 없는 마을이 된다. 확성기, 지팡이, 귀고리 달린 모자들 따위 소품으로 번잡하다. 이 소품들을 쥘 때마다 이들은 다른 인물로 둔갑한다. ‘슈퍼맨의 망토’인 셈. 연출가 박혜선씨는 “한 배우가 주류와 비주류 인물들을 함께 연기하면서 표현도 깊어지고 내적 갈등도 심화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최덕문(진구 역)씨는 “10년 넘게 연기를 했는데 이번처럼 힘든 건 처음”이라고 말한다. 연습이 한 달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홍성춘(진구)씨는 “김성녀 선배가 모노극 <벽 속의 요정> 대본을 보름 만에 외워서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을 위안 삼을 뿐”이란다. 중간 대목엔 1분 동안 등장하는 인물이 물경 아홉이다. 물론 ‘망토’도 아홉번을 새로 두른다. 갑택이 서울깍쟁이 감독이 됐다가 정상의 여배우 나주리가, 또는 철구 아버지가 된다. 진구 또한 단역들을 무시하는 양혜수인가 싶으면, 술주정뱅이 철구가 되고, 철구인가 하면 다시 정씨 할아범이다.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혜선씨는 “중심인물은 물론 다른 배역에 대한 감성적 이해, 그리고 이들의 앙상블까지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품의 밑그림부터 애당초 배우들과 함께 그렸다. 번안도 함께 했던 배우 서현철(갑택)씨는 “연출과 배우의 비중을 따로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배우가 가장 부드럽게 배역을 이동할 수 있는 때가 그렇게 찾아진다. 그래야 슬픔도 자연스럽다. 철구가 단역으로도 뽑히지 못해 주머니 속에 돌을 넣은 채 강물에 투신한 때부터. 원래 아일랜드 작가 메리 존스의 정통 시나리오다. 웨스트 엔드가 2000년, 2명의 배우가 이끄는 스탠딩 코미디극으로 만들어 “코미디 걸작”(<가디언>)으로 상찬받았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배역에 저마다의 동선과 갈등요소를 씌워 ‘가장 연극적인 2인 모노극’이라는 모순 수식을 가능하게 한 건 여기 공연팀이다. 주변과 중심부의 용해되지 않는 마찰에서 웃음은 비롯한다. 서울과 강원도, 표준어와 사투리, 주연과 엑스트라…. 웃음이 깊어지면 슬픔이 된다. “이 사람들 결국 엑스트라일 뿐이거든. 결국 우리 이야기인데요, 뭐.”(박철민) 지난달 7일부터 하루 6시간씩 연습하고 있다. (02)741-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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