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4 17:24
수정 : 2005.08.24 17:25
노승림의무대X파일 - 중국 국·공 내전 항의해 수염 길러
중국을 대표하는 전통공연예술로 흔히 경극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이는 그렇게 오래된 예술이 아니다. 건륭제의 80살 생일잔치 때 안후이 지방의 한 무명극단이 베이징에 와서 공연한 것을 시초로 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고작 20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그 여파는 무시 못할 것이어서, 당시 베이징 일대에 크게 붐을 이루고 심지어 경극배우 양성소까지 생겼다고 한다.
얼굴에 물감을 잔뜩 칠하고, 노래나 무용처럼 느껴지는 격렬한 동작을 곁들이는 이 형식 연극은 두 명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경극을 주제로 만든 영화 <패왕별희>에서 주연을 맡았던 장국영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바로 저 유명한 메이 란팡(1894~1961)으로, 우리에게 매란방으로 알려진 희대의 배우이다.
실상 경극의 흥망성쇄는 메이 란팡의 그것과 일치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경극에서 여자역에 해당하는 단()역 전문배우(당대 중국에서는 한 무대에 남녀가 함께 서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터라, 여자 역할까지 남자가 모두 소화했다)였던 그의 본명은 하오팅()으로 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단()역 전문배우였다.
14살에 부모를 잃은 그는 당대 명배우 주샤펀의 제자로 들어갔다. 워낙 용모가 출중하였던 그는 데뷔 무대에서부터 청중들을 한 몸에 사로잡았다. 이후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옮겨간 그는 서구 문물의 영향을 크게 입은 그 도시의 색다른 풍경에 남다른 인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현대적인 색채가 가미된 연기를 선보이며 경극의 현대화와 서구화에 앞장섰다.
동서양의 요소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메이 란팡은 이번에는 이를 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 등지의 순회공연은 경극을 중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메이 란팡은 ‘경극대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경극의 현대화만큼이나 중국의 근대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중국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중일전쟁 때에는 홍콩에 은거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동포들끼리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다시는 경극 무대에 서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그 표식으로 수염을 길렀다.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가 수염을 길렀으니, 이는 확실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이런 메이 란팡이 수염을 깎고 다시 경극배우로 무대에 나선 것은 1958년 데뷔 50주년 기념무대였다.
메이 란팡의 사후, 중국의 경극은 침체일로에 빠지며 쇄락의 길을 걸었다. 경극의 형식과 줄거리가 더 이상 현대의 중국인들의 취향으로 다가서지 못한 까닭이다. 이는 메이 란팡처럼 시대를 내다보며 그 장르를 발전시킬 인물이 부재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예술에 있어 제자리걸음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뒤로 쳐지고, 또 잊혀지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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