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인생 30여년 ‘멀고 먼 길’이었다-한대수가 말하는 ‘나의 음반들’
|
노래인생 30여년 ‘멀고 먼 길’ 이었다
1974년에서 2004년까지 한대수는 정규앨범 10장을 발표했다. 평균잡아 3년에 한장 꼴이지만 10년 이상 긴 침묵에 빠져있던 적도 있고, 8집을 내놓으면서는 더 이상 음반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어떤 음반은 유신 검열의 빨간 줄로 도배가 됐고 어떤 음반은 뉴욕의 비좁은 아파트 응접실에서 녹음됐다. 과거의 고단한 기억을 접고 이제는 전집으로 오붓하게 모이게 된 한대수 음반 역사를 한씨로부터 들어봤다.
자고나니 히트곡 작곡가 됐더라
히트곡 작곡가에서 판금 가수로-<멀고 먼 길>(1974), <고무신>(1975)=68년에 미국에서 돌아와 쎄시봉 같은 무교동이나 명동 클럽에서 연주를 했죠. 그렇지만 남진, 이미자 시대라 음반낼 엄두도 못내다가 군대를 갔다왔는데 그 사이 김민기씨가 1집 앨범에서 ‘바람과 나’를, 또 양희은씨가 ‘행복의 나라’를 앨범에 수록해서 인기를 얻은 거야. 졸지에 히트곡 작곡가가 된 거죠(웃음). 이 덕분에 씨비에스 김진성 피디의 소개로 목마르게 기다렸던 음반 제작을 할 수 있었어요. 이게 주목받아 상도 타고 그래서 2집 음반은 수월했죠. 근데 2집 표지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사진에 노래 제목도 ‘자유의 길’이니 바로 판매금지 당하고 그 여파가 1집까지 영향을 미쳤죠. 완전히 활동중지 상태가 된 건데 그때 <코리아해럴드> 기자를 하고 있을 때라 먹고 살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여기서 음악을 접고 기다릴 건가, 떠나서 음악을 계속 할 건가 무지 고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거죠.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짐 모리슨 등등을 듣고 있으면 미치겠는 거라. 음악이 하고 싶어서.
한국서 적응못해 다시 미국으로
생계와 싸우며 방에서 녹음을 하던 뉴욕시절-3집에서 7집까지(1989~1999)=미국에 돌아가보니 히피시대는 끝나고 분위기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더라구요. 2~3년 동안 그야말로 생존 투쟁만 하다가 현지인들과 징기스칸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연주활동을 했는데 미국은 우리 음반 시장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니까 결국 음반제작 기회를 못잡았어요. 첫 아내와 이혼하고 ‘왜 사나’ 싶은 생각으로 힘들 때 1집을 냈던 신세계음향 사장이 한국에 당장 들어오라고 해서 3집 <무한대>를 녹음했던 거죠. 당대 최고의 세션들과 함께 작업해서 음반 작업은 만족스러웠는데 너무 오래 한국을 떠나 있어서였는지 더 있을 분위기가 아닌 것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다시 돌아갔어요. 거기서 재즈 피아노 치는 이우창과 기타 치는 잭 리 형제를 만나게 됐어요. 그들과 4집에서 7집까지 작업했어요. 5집 만들 때는 돈이 없어 녹음 스튜디오는 커녕 연습실도 못 구할 처지였는데 어느 날 집에서 이우창이 연주하는 걸 무심코 듣다가 어떻게라도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돈 5천달러를 꿔서 당시에 새로나온 녹음기계를 사서 우리집 응접실에서 녹음을 했던 거예요.
“음악 포기” 선언 했었는데…
음악포기를 선언하게 만든 <이터널 소로우>, 그리고 다시 만든 음반들(2000~2004)=6집을 대신한 97년 후쿠오카 라이브 이야기 잠깐 할게요. 그때는 건축 사진을 찍을 때라 엄청 작업이 고됐어요. 기타는 다 녹이 슬었죠. 근데 난데없이 일본에서 공연 초청이 온 거예요. 나라 망신시킬 것같아서 거절했는데 계속 연락이 오더라구요. 주변 친구들의 설득으로 8개월 동안 연습을 하고 일본 공연을 하고 나니 한국에서 마치 잊혀진 가수의 부활처럼 조명을 하더라구요. 공연 초청도 오고, 접었던 음악을 다시 하게 해준 공연이라 제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가 된 사건이었죠. 그리고 8집 <이터널 소로우>를 녹음하러 한국에 왔는데 음반사 5군데서 거절당했어요. 솔직히 낙심했죠. 이정도 오래 음악을 했으면 음반사 한 두군데서는 먼저 제안이 올 줄 알았는데, 그때는 너도나도 댄스음반만 찍어낼 때였으니까. 그래서 짐싸고 미국 돌아갈 준비하는데 몇번 같이 녹음했던 기타리스트 손무현에게 전화가 왔죠. 이러저러해서 돌아갈란다 하니까 그 친구가 나서서 음반사를 구하고 녹음을 추진했던 거죠. 하여튼 너무 지쳐서 그때 음반 부클릿에 이제 더 이상 음반을 안내겠다고 했는데, 두장을 더 내게 됐죠. ‘네버 세이 네버(절대로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말이 역시 명언이라니까(웃음).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재발매 뛰어든 외인부대 ‘4인방’
뮤직리서치 리듬온 리버맨 비트볼
뮤직리서치, 리듬온, 리버맨, 비트볼. 재발매에 뛰어든 4인방이다. 주로 혼자, 많아 봤자 셋이 뭉쳐 만든 회사들이다. “음악이 좋아서”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 지 2~3년 넘었다. 고생은 따놓은 당상, 이익은 용돈 정도면 다행인데도 ‘왜 하느냐 물으면 웃지요’다.
|
재발매 뛰어든 외인부대 ‘4인방’
|
비트볼=2000년 이봉수(33) 사장 등 셋이 뭉쳐 만들었다. 취지부터 “소장 가치 있는 복고적 앨범의 발굴”이다. 음악 매니아 이씨가 레코드점에서 일할 때 손님과 판매원으로 만난 사이다. 재발매 조류의 첫 파도를 탔다. 신중현씨의 작품집 가운데 이정화씨의 <싫어, 봄비, 꽃잎, 마음>, 김정미씨의 <나우> 등 7장 정도를 냈는데 특이하게 모두 엘피로 만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아날로그 사운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200장에서 1천여장씩 찍었고 대부분 본전은 뽑을 정도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다 히식스 앨범 <고고>를 충실히 만들어보겠다고 엘피 2장에 사진 등 자료까지 넣었다가 제작비 초과로 “주저앉을 뻔했다.” 이 사장은 “다른 재주 없어” 이 길만 쭉 파고, 나머지 둘은 카페 영업, 영화 포스터 디자인으로 주머니 속 빈 공간을 채운다.
이 사장이 속 타는 건 이럴 때다. “음반사가 판권을 가졌을 땐 실체라도 확실하죠. 기획사가 가담해서 낸 음반은 판권자가 오리무중이기 일쑤예요.” 마스터테이프 보관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지구레코드나 아세아 정도가 그마나 잘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힘든 걸로 치자면 뭐니 뭐니 해도 판권자와 줄다리기하는 지난한 협상 과정이다.
노래방에서도 죽자사자 옛 노래만 불러 제끼고, 핸드폰 컬러링도 “70년대 후반 고급스러운 팝을 들려줬던 가수”라며 이미대의 ‘당신은 안개였나요’를 담은 이 사람들. 가요에서 해외 60·70년대 팝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제인폰다가 나온 영화 <바바렐라>(1968년)의 오에스티 재발매에 눈독을 들였다.
리듬온=30대라고만 밝히는 손병문 사장은 혼자 뛴다. 윤현선, 히식스, 현경과 영애 등의 앨범 6종류를 재발매했다. 그 전에 10년 동안 경북 안동에서 레코점을 운영했다. “찾을 수 없는 걸 듣고 싶은 열망에, ‘더 싼 값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소한 음반을 들을 수 없을까’라는 바람을 보태” 4~5년 전부터 이런 사업을 꿈꿨다. 같이 해보자 손 내밀면 거절 당하기 일쑤. 미루다 2년 전 혼자 저질러 버렸다.
그는 “이해관계가 얽혀 풀기 힘들 때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현경과 영애의 앨범 재발매 때 특히 그런 문제에 부닥쳤는데 “어릴 때 듣던 추억”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다. 마스터테이프도 반쪽짜리라 나머지 반은 음질 좋은 엘피를 찾아내 복각했다. 잊을 수 없이 짜릿한 순간은 창고에 방치돼 있던 ‘마그마’의 마스터테이프를 찾았을 때다. “그것도 음반사에서 허락해야 뒤져볼 수 있는데 운이 좋았죠.” “큰 돈벌 욕심은 없고 재발매 작업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는 목소리부터 진중하다.
리버맨과 뮤직리서치=재발매하는 사람들은 열정만 먹고 사나? 이들도 현실 감각이 있다. 은희, 이연실의 앨범 등 70년대 포크 음악을 주로 내는 뮤직리서치의 곽근주(33) 사장은 원래 팝 관련 일을 하다 방향을 바꿨다. “요즘엔 사람들이 팝을 듣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새 가수를 키우는 건 자본이 많이 들죠.”
혼자 일하며 ‘따로 또 같이’, 오세은, ‘로커스트’, ‘맷돌’ 등의 앨범을 다시 낸 리버맨의 이재수(36) 실장은 원래 반도체회사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했다. 3~4년 전 “너무 지겨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반 듣고 모으기 취미”를 살려 음반업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도 처음엔 외국음반 수입을 했는데 재발매 틈새시장을 발견하고 방향을 바꿨다. “동경만 했던 작곡가나 가수를 만나는 것도 좋다”는 그는 재발매 작업에 애정은 많지만 큰 기대는 없다.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앨범이 많지 않아요. 내년 이후로는 이 사업도 죽어 앨범이 안나올 것 같아요.” 말은 그런데 그는 재미를 못 버려 앞으로 영화 <별들의 고향> 오에스티를 내볼 생각이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
이런 음반 재발매 됐으면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어떤 음반이 재발매되길 바랄까? 평론가 세 사람이 각각 두가지 앨범을 추천했다. “왜 두개로 제한하느냐, 뽑기 어렵다”는 반발도 있었다.
|
이런 음반 재발매됐으면
|
박준흠=김창기씨의 솔로 앨범 1집 <하강의 미학>(2000년). 김창기씨는 1990년대 가장 주목할 만한 작사·작곡가다. 그룹 ‘동물원’에 참여해 만든 작품보다 이범용씨와 함께 한 <창고>와 이 앨범에 담긴 곡들이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태춘씨의 <92년, 장마 종로에서>(1996년). 정태춘씨는 한국에서 가장 노랫말을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앨범은 민중음악가로 이름을 날리며 현실참여적인 노래를 불렀던 정태춘씨의 방향선회를 보여준다. 미학적으로 다듬어진 아름답고 새로운 노래들을 만날 수 있다.
|
이런 음반 재발매됐으면
|
임진모=‘4월과5월’의 모든 앨범. 최소한 베스트 곡이라도 묶여 나왔으면 좋겠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이들은 포크 음악의 백미를 보여준다. ‘장미’, ‘옛사랑’, ‘등불’ 등 주옥같은 인기곡을 남겼다. 백순진의 작곡도 뛰어나거니와 김태풍과의 화음은 환상적이다. 탁월한 그룹이 망각의 늪에 빠진 게 안타깝다. ‘동서남북’의 (1981년). 자유로운 록을 실험한 앨범이다. ‘나비’라는 곡 등에선 아트록을 선보였다. 돈도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도 빼어나게 만들었다.
송기철=김두수의 <약속의 땅>(1988년). 토속적인 정서가 묻어나는 포크음악이다. 노랫말의 문학적 가치가 높고 실험적인 곡들을 담았다. 한국적인 서정미가 돋보이는 앨범이다. 동물원 세 번째 노래모음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1990년). 김창기씨의 재능이 빛을 발한다. ‘유리로 만든 배’, ‘가을’ 등은 지금 들어도 세련되다. 그룹 ‘동물원’ 노래들에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그렇듯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놓치고 싶지 않아하는 감수성이 배어난다.
김소민 기자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