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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4 20:46 수정 : 2005.09.15 13:57

노승림의무대X파일 - 바이로이트 ‘치맛자락 휘날리며’

바그너 가문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벨에서 정치적 주도권은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지난 주 언급하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가 그러했고, 위니프레드 이전에는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자 리스트의 딸이자 한스 폰 뷜로의 전처였던 코지마가 있었다. 바그너의 절대적인 옹호자였던 코지마는 전 남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버리고 스물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찾아갔고 바그너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결과적으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지을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와 더불어 코지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그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거리에서나 음악언어에서나 지극히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는(심지어 여성 등장인물조차 남성스럽기 그지없는) 바그너가 실은 여성 의존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바그너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어린 시절 얼마나 철부지이고 어리광장이였는가를 알 수 있는데, 이를 다 받아준 것은 그의 네 명의 누이들이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 이야기 대신 누이들에 대한 애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도 각별했던 누나가 10살 위의 로잘리였다. 로잘리는 양아버지가 죽자 불과 열일곱 살의 나이로 동생들을 먹여 살리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임신 중 사망했다. 바그너의 주변 여인들은 이렇듯 처음부터 하나같이 생활력이 강했으며 또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바그너 가문의 발퀴레(<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여전사)적인 기질은 바그너가 죽고 난 뒤에도 후손들에 의해 끊이지 않고 계승되었다. 바이로이트 공동대표였던 형 빌란트가 급서한 뒤 운영 전권을 위임받은 볼프강 바그너는 몇년 전 차기 축제국 대표로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 카타리나(1976년생)를 지목해 바이로이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에 팬클럽까지 있을 만큼 인기가 높지만 나이가 한참 어린 데다 예술적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는 그녀의 계승에 대해 볼프강 전처의 딸 에바와 형 빌란트의 딸 니케가 적극적인 반기를 들고 나섰다. 만약 카타리나가 대표직을 이어받을 경우, 카타리나의 어머니이자 볼프강의 아내인 구트룬의 섭정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카타리나와 달리 에바와 니케는 바그너 연출과 드라마투르기로서 이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여전사들이다. 특히 최근 들어 니케의 활동은 유럽 전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 바이로이트에서 자의반 타의반 추방당한 니케는 어엿한 바그네리안으로 성장하여 삼촌 볼프강 바그너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바이로이트의 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뮌헨 오페라 극장에는 니케가 드라마투르기를 한 <니벨룽의 반지>가 상연되며 커다란 화제를 불러 모았다. 바이로이트 극장 자체를 무대로 삼은 니케는 마지막 4부 <신들의 황혼>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메카 바이로이트 극장이 불에 타 스러지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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