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12 16:59
수정 : 2005.10.13 15:28
낭만보다 현실 꿈꾸는 묵직한 저항의 몸짓
유토피아는 없지만, 유토피아적 열망은 몸의 해방감을 낳는다. 인간다운 세상으로 뒤집으려 했던 이들이 춤추는 리듬은 여전히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부화시킨다. 발레 <스파르타쿠스>는 한 노예 검투사의 ‘인간 선언’이 어떻게 로마를 떨게 만드는 치열한 몸들의 소용돌이로, 해방의 군무로 번져나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도 발레의 자기혁신을 통해서.
블로흐의 구분에 따른다면, <스파르타쿠스> 이전의 발레는 ‘밤꿈’의 세계였다. 왕자와 공주의 덧없는 로맨스, 요정의 핏기없는 아름다움, 대지에서 이탈한 천사의 이미지 등등 사춘기 이전의 낭만주의가 오랫동안 침전된 세계였다. 주어진 꿈에 취한 세계였기에 ‘공중들린’ 발레리나는 현실에서 발을 떼고 천상의 이데아로 퇴행해버렸다.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안무한 <스파르타쿠스>는 치열한 ‘낮꿈’의 세계이다. 자신의 뜻과 달리 동료를 죽여야 했던 이가 사슬을 끊고, 혁명을 자각하는 현실을 꿈꾼다. 사랑하는 여인을 살아있는 이상의 횃불처럼 들어올리며, 억압적인 체제에 저항한다. 이처럼 자유를 갈구하는 저항의 발레는 위험하다. 삶의 걱정 때문에 이상을 버렸던 이들은 한없는 노스탤지어를 느끼고, 난생 처음 자유를 위한 투쟁이 가진 미의식에 눈뜬 이들은 뜻밖의 발레가 육박해오는 힘에 압도당하니까.
볼쇼이의 이번 무대는 전성기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무용수의 수가 줄고, 몸 쓰는 맛도 다소 약해졌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대로 주인공 스파르타쿠스와 연인 프리기나의 열연은 진정성이 뚝뚝 듣는 발레이다.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한가’라는 소박한 질문이 발레 테크닉이 가진 유토피아적 몸의 성격과 만나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아쉬운 것은 그에 맞서는 로마 장군 크랏수스가 밋밋했다는 점이다. 극적 구조 자체는 언제나 강적을 원한다. 더구나 쾌락과 두려움에 번갈아 취하며 분열하는 역할은 자본주의에 취한 우리 현실을 시사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확장해보면, <스파르타쿠스> 공연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모순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안전해진 ‘체 게바라’의 소비처럼 이 공연은 몰락한 소비에트의 최고 문화상품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조건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꾸는 ‘낮꿈’은 뾰족하고 우뚝하다. 불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노예는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육화한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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