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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6 17:05 수정 : 2005.10.27 15:51

노승림의무대X파일

조만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한다. 이 관현악단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지휘자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의 취향이 다른 까닭에.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가 낳은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클래식 음악인으로서 카라얀처럼 권세와 명성을 누린 아티스트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음악에 대해 문외한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카라얀’은 클래식과 동일시되는 이름이자 간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도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부터 독일 바이로이트까지 무려 250마일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갈 만큼 음악에 대한 열성과 집념은 대단했지만 25살까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 독일을 방황해야 했다. 포디엄에 서기 위해 “어떠한 짓이라도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었던” 카라얀은 1933년 27살에 나치 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그 시점과 맞물려 독일 역사상 최연소 음악감독으로서 아헨 극장에 입성했다.

1937년 빈 국립오페라극장 데뷔, 1938년 베를린 필 데뷔, 그 해 9월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데뷔 등 이후 카라얀의 음악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패망하면서 밀라노에 있던 그는 나치주의자로 오스트리아에 송환되어 연주행위를 금지당했다. 약 2년 뒤 공식적인 금지는 해제되었지만 나치 경력은 족쇄가 되었다. 유럽 클래식 음악계를 좌지우지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특히 이 후배를 “박쥐같다”는 이유로 싫어하여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지휘대를 좀처럼 넘겨주지 않았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뜨자 베를린 시민들은 차기 베를린 필의 지휘봉이 세르주 첼리비타케에게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출신의 이 비타협적인 완벽주의자가 당시 막 부흥하고 있었던 레코드 산업에 대해 지닌 결벽증이 가장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음반 레코딩을 “음악을 통조림에 넣어 파는 행위”라며 죽을 때까지 극도로 혐오했던 음악가였다.

결국 베를린 필은 차기 지휘자로 레코딩 업계에서 막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카라얀을 선택했다. 푸르트뱅글러 생전에 계약되어 있던 1955년의 미국 연주여행을 그가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했다. 그는 이 미국 여행을 기회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자리를 요구했고, 베를린 필은 이를 수락했다.

자신을 부르고 돈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않던 그는 오대양 육대주를 가로지르며 ‘카라얀’이라는 이름을 전세계 지휘대에 수놓았다. 그런 그의 내한 공연은 1984년에야 성사되었다. 그가 한국 공연을 마지막까지 마다했던 이유는 작곡가 윤이상이 얽힌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때문이었다. 지휘봉을 잡기 위해 나치 당에까지 가입했던 그는 “예술을 탄압하는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완고히 거절하다가 독일문화원과 정부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서거 5년 전에 세종문화회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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