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위아래사람들
신정엽(34·영동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씨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공연 영상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지난 2000년 국은미 안무의 <솔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김원, 안애순, 국은미 등 안무가들의 작품 속에서 ‘영상 게릴라’로서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영상은 무대의 분위기를 바꾸고, 정서를 바꿉니다.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공연의 연장이죠. 몸과 음악에 이어 무대의 세번째 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영상의 무대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있다. 지난 10월 열린 서울세계무용축제나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공연된 벨기에와 핀란드의 작품은 그런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영상이 ‘제3의 무용수’로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배경 아닌 제3의 무용수”불모지에 게릴라식 영역 개척 중요한 것은 춤과 영상을 결합하는 능력이다. 안무가가 춤을 통해 전달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영상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발견하는 것이다. “안무자는 영상이 자기 춤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같은 영상이라도 언제 어떤 느낌으로 쓰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요.” 관객의 반응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반응이 시원치 않다 싶으면 즉석에서 고친다. 현장에서 영상을 만들어 ‘쏠 수 있는’ 전용 프로그램을 찾아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쓰이게 한 것도 그였다. 당시에는 외국에서도 잘 쓰지 않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홍대 앞에서 전위 음악을 하는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에서 키보드를 쳤던 류한길, ‘자양강장제’ 일원으로 영상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정호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최근 열린 전위음악가들의 공연인 ‘윤이상과 현대 미디어뮤직의 만남’ <밤이여 나뉘어라!>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들의 공연은 기존의 악기를 제외한 모든 도구를 활용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전기톱으로 쇠파이프를 ‘썰기’도 하고, 시디(CD) 여러개를 틀어놓고 면봉으로 ‘긁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제가 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0~9의 숫자를, 최정호씨는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0~9의 숫자를 영상에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류한길씨는 그 두개의 숫자 조합에 따라 컴퓨터의 키보드를 눌러 음악을 연주하죠.” 70~8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실험음악의 대가 존 케이지의 후예들인 셈이다. 이달에도 25일 공연할 예정이다. 신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대에 갔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자신이 선택한 전공(시각디자인)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과가 아니었다. 무대미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무대미술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영화를 알게 됐다. “원래 하고 싶을 땐 확 질러버리는 성격”이어서 1993년 졸업하자마자 프랑스로 영화 공부를 떠났다. 그런데 그는 유학생활을 통해 뒤늦게 ‘의식화’됐다. 운동권 출신인 선배를 만나 역사, 철학, 예술 등에 관한 ‘세미나’를 시작한 것이다. ‘강남 날라리’였던 그가 영화감독 데뷔를 하려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유식해진 것은 특이했던 유학생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분간 시나리오 쓰는 일과 무용 영상을 함께할 겁니다. 무용은 언어를 비롯한 다른 어떤 매개체 없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거든요. 무용의 그런 직접성은 제게 항상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글·사진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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