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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3 16:50 수정 : 2017.03.23 21:52

김성룡 사진기자의 일우사진상 수상기념전 ‘오답노트: 특이한 점’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소문 일우스페이스 전시장. 들머리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전행사장 설 자리를 점으로 표시한 ‘오답노트’ 연작의 일부가 보인다.

한진그룹 쪽 일우재단 주최하는 일우사진상 수상전 ‘눈치보기’
‘박 전 대통령 의전의 이면’ 포착한 전시 탄핵 뒤로 연기
재단 쪽 “회장의 국외 출장으로 보고승인 늦어” 해명

김성룡 사진기자의 일우사진상 수상기념전 ‘오답노트: 특이한 점’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소문 일우스페이스 전시장. 들머리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전행사장 설 자리를 점으로 표시한 ‘오답노트’ 연작의 일부가 보인다.

“저는 헌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되길 간절히 바랐어요. 정치적인 이유 탓이 아니라, 지금 저의 이 전시가 (탄핵 직전인) 3월2일 개막일이 잡혔다가 무기연기됐거든요. 3월10일 탄핵 인용이 발표되고 나서 바로 전시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22일 오후 서울 서소문 대한항공 사옥 1층 일우스페이스 전시장에 모인 청중 사이에서 가벼운 술렁거림이 일었다. 이날 개막한 일우사진상 수상기념전 ‘오답노트: 특이한 점’의 주인공인 <중앙일보> 사진기자 김성룡(43)씨는 뜻밖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원래 전시 시작 날짜인 3월2일이 제겐 마라톤의 골인 지점이었죠. 지난 1년간 전력을 다해 달려왔는데 갑자기 골인 지점이 사라진 겁니다.”

그는 지난해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이 주관하는 일우사진상 올해의 특별한 작가상 수상자였다. 왜 이런 고백을 수상기념전 개막날 털어놨을까. 전시는 탄핵과 무슨 관계일까.

전시 출품작들은 흔히 ‘정답’이라고 사진기자들이 부르는 정형화한 보도사진을 찍다 포착된 권력 이면의 풍경을 담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국내외 의전 행사에 나타나기 전 청와대 요원들이 대통령이 서거나 앉을 지점을 미리 찍어 표시한 점 또는 표지들을 클로즈업했다. 청와대를 출입했던 작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과학의 날’ 기념식장과 6개 나라 주한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이 열린 청와대 홀의 바닥 카펫, 중국 항저우의 주요 20개국 정상회담장 바닥 등에 틈틈이 렌즈를 들이대고 이 미세공간에 권력의 존재감을 내뿜는 점들을 찍은 연작 20여점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궁중행사를 그린 의궤 그림에서 화려한 의전 기물들과 건물, 행렬의 모습은 보여도 임금과 세자 등은 인물을 그리지 않고 빈 용상이나 빈 가마 등만 그려 더욱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것과 비슷한 구도로 비친다. 예상되는 행사나 사건에서 예상되는 독자들의 시선과 관심에 부합하기 위해 일부러 연출하거나 각 잡아 찍는 정답의 보도사진과 취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찍히는 이면의 이미지들 사이에서의 고민 등도 행간에서 느껴볼 수 있다.

김성룡 기자의 ‘오답노트’ 연작 중 일부 작품을 확대한 컷. 지난해 청와대 영빈관 바닥 카펫에서 포착한 자리 표지점과 그 위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까만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전시는 원래 3월2일 개막할 예정이었다. 개막을 열흘 앞두고 작가는 “상부 결재를 못 받아 전시를 무기연기한다”는 재단 쪽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앞서 재단 기획진은 지난해 12월 작가와 ‘특이한 점’이란 주제로 전시를 열기로 합의하고 3월2일 개막하는 전시 기간과 출품작 목록 협의까지 마무리한 상태였다. 작가는 “출품 사진 목록도 모두 제출했고, 3월2일 시작하는 전시 안내장과 ‘오답노트’란 제목의 사진집까지 만들었는데, 무기연기라니 황당했다”고 했다.

“윗분한테 아직 작품 들고 가 대면 보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작품 내용이 청와대 쪽에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서 이를 의식한 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20일 넘게 기다렸는데, 10일 탄핵 발표되고 다음날 상부 승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10일 윗분에게 보고하는 일정을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청와대 홀 바닥의 붉은 카펫 위에 붙여진 박 전 대통령의 자리 표지점. 전시 중인 ‘오답노트’ 연작의 일부로 푸른 바탕에 노란 점이 들어간 동그란 형광지다. 지난해 주한 외국대사 신임장 제정식이 열린 날 찍은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탄핵이 기각돼 전시가 불투명한 상황이 됐다면, 작품을 반납하고 공개 항의를 하는 방안까지도 고민했었다”며 “그나마 원래 의도대로 전시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진그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와중에서 조양호 회장이 평창겨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자리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임했고, 평창 관련 사업에서도 배제되는 등의 곡절을 겪은 바 있다. 사연을 전해 들은 사진계 한 중견작가는 “전시 재개는 다행이지만, 사실상의 검열이자 재벌 재단의 갑질로도 비칠 수 있다”고 했다. 재단 쪽 관계자는 이에 대해 “조양호 회장이 국외 출장으로 보고를 뒤늦게 받아 전시가 미뤄진 것이며 탄핵 발표일과 보고 시점이 겹친 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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