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5.14 15:38
수정 : 2017.05.14 20:04
[100℃] 막 오른 베네치아 비엔날레 현장
5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현장 탐방기
불확실성의 시대 최후 보루로서 ‘예술의 힘’
어둡고 우울했던 2년 전과 달리
낙관적 분위기 다수…개성있고 기발해
어려움 겪은 한국관도 눈길
색다른 작품 구성 기대 이상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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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관들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독일관의 다장르 융합 작품 ‘파우스트’ 전시 현장. 관객들이 밟고 서 있는 거대한 투명 유리판 바닥 아래로 퍼포먼스 배우들이 다기한 몸짓을 하며 움직인다. 기획자 주자네 페퍼와 작가 안네 임호프가 함께 만든 이 작품은 공간과 퍼포먼스, 음악, 관객들의 호흡 등을 결합시키며 불안한 지금 시대와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절절하게 되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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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어느 시대보다도 불확실성이 짙어진 21세기 현실 앞에서도 그들은 계속 몸과 손을 움직이며 꿈틀거렸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름잡던 글로벌 도시 베네치아는 지금 결기에 찬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곳에서 13일 개막한 5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11월26일까지)은 예술의 인간주의가 지속될 것임을 선언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작가들은 식물덩굴로 짠 그물집에서 쉴 것을 권하고, 음악과 빛이 출렁거리는 작업장을 차리는가 하면, 관객들 발밑에서 예술은 살아 있다고 절규하며 몸부림쳤다.
122년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세계 미술계의 가장 큰 잔치다. 51개국 120명 작가가 참여하는 본전시와 86개 국가관 전시, 수십개의 연계 전시가 시내에서 열린다. 올해는 ‘비바 아르테 비바’(Viva Arte Viva: 예술 만세)란 주제처럼 예술가들의 작업과 형식, 생각에 방점이 찍혔다. 전시 총감독 크리스틴 마셀은 개막 전 기자회견에서 “예술은 난세에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 보루”라고 단언했다. “예술가의 목소리를 좇으며 인간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전시가 될 것”이란 그의 말대로였다. 참여 작가와 기획자들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예술은 시대의 징표로서 무엇을 풀어내야 하는지를 다채로운 시각언어와 전시의 연금술로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출신의 오쿠이 엔위저가 기획한 2년 전 행사가 정치적 저항,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지닌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여유와 낙관의 분위기가 감돈다.
■ 노출과 단절…화제의 독일관 변모가 도드라진 건 카스텔로 공원과 시내 곳곳에 자리잡은 국가관들이다. 비엔날레를 문화국력의 경연장으로 보고 주제와 동떨어진 과시성 작품들을 내놓았던 관행을 벗어나 ‘예술 만세’에 걸맞은 개성적인 작업이 상당수 등장했다. 특히 괴테의 소설에서 따온 ‘파우스트’란 제목으로 퍼포먼스와 국가관의 건축적 특징을 활용한 공간변형이 융합된 작품을 내보인 독일관은 줄곧 화제를 모았고, 대다수 전문가들 예상대로 대상(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기획자 주자네 페퍼와 작가 안네 임호프가 함께 만든 <파우스트>는 발상부터 도발적이었다. 천장이 높은 전시장 하부에 관객들이 밟고 설 거대한 투명 유리판 바닥을 깔고 그 아래로 퍼포먼스 배우들이 몸을 뒹굴며 돌아다녔다. 나치 시대 만든 권위적인 전시관 공간 구석구석과 지붕 위, 관객들 사이에도 배우들이 나타나 시대의 답답함을 호소하는 노래와 몸짓을 쏟아냈고, 건물 앞 철제 우리 안에서는 갇힌 개들이 울부짖는 풍경도 펼쳐졌다. 모든게 샅샅이 노출되지만, 단절은 더욱 심해지는 우리 시대 삶을 강렬하게 비춘 전시관은 연일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독일은 본전시에 천조각 작업들을 내건 자국 작가 프란츠 에르하르트 발터까지 작가 황금사자상을 받아 현재 세계 미술계를 이끄는 최강국 위상을 과시했다.
도심 해안포구 앞에 차린 대만관 전시에도 눈길이 모아졌다. 중견작가 셰더칭은 ‘한 해의 퍼포먼스’란 제목으로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자기 얼굴을 찍거나, 미국 뉴욕에서 노숙인으로 살았던 경험과 이동경로를 낱낱이 기록한 자화상 같은 작업들을 내놓았다. 설치작가 마야 린의 베트남참전기념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들은 예술가의 고단한 창작의 길을 진솔하고 숭고하게 드러냈다는 상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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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내 카스텔로 공원 진입로에서 펼쳐진 이수경 작가의 퍼포먼스 ‘태양의 궤도를 따라서’. 한국 무속의 상상력을 변주해 한국 전통복식, 춤, 음악에 보디빌딩, 현대음악이 어우러진 독특한 퍼포먼스로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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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날레 본전시에서 눈길을 모은 브라질 작가 이르네스투 네투의 설치 공간. 식물덩굴들로 거대한 그물망을 둘러친 이 쉼터 같은 공간에서 관객들은 아마존 인디오와 함께 앉아서 쉬며 대화하고 눈빛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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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상식’ 깨는 작품들 관람의 상식을 깨는 시도들이 줄줄이 등장한 것도 올해 국가관 전시의 특색이다. 조각가 그자비에 베양이 미디어작가 크리스천 마클레이와 협업한 프랑스관은 현대음악이 징징 울리는 음악스튜디오로 대변신을 감행했다. 작가 에르빈 부름이 출품한 오스트리아관은 물구나무선 25톤짜리 대형 트럭이 전망대가 되거나 캠핑카에 뚫린 구멍으로 내부 관객들이 발과 다리를 내뻗어 작품의 일부가 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캐나다관은 전시장 전체를 아예 시원한 분수대로 만들어버렸고, 전시장 바닥에 구멍을 뚫어 관객 한 명이 차례차례 머리를 내놓고 목조건축 모형을 관람하는 일본관, 벽을 뚫어 나무와 풀이 우거진 생태숲을 조성한 덴마크관의 파격도 신선했다. 이탈리아 건축거장 카를로 스카르파(1906~1978)가 디자인한 베네수엘라관은 건립 61돌을 맞아 화가 후안 칼사디야가 수묵화 같은 그림과 설치물을 스카르파의 공간 여기저기에 헌정하듯 배치하는 시적인 작업들을 선보였다.
이대형 기획자가 꾸린 한국관도 빠지지 않았다. 작가·기획자 인선을 둘러싼 잡음 등으로 애초 완성도 등에서 우려를 샀지만, 야릇한 작품 조합으로 눈길을 붙들었다. 독일관 바로 옆에 자리한 한국관은 독일관의 묵직한 시대공감 메시지와 전혀 다른 요란스럽고 얄팍한 네온 간판을 번쩍거리는 외관으로 이미지의 충돌을 빚어냈다. 코디 최 작가가 비엔날레 상업화를 꼬집으려 만들었다는 이 네온 설치작품(<베네치아 랩소디>)은 진부한 포스트모던 스타일이지만, 전시 마중물 구실을 해냈다. 작품성 면에서는 세계화, 우리 근대사의 굴곡 등을 조명한 이완 작가의 설치작업들이 단연 각광받았다. 세계화 시대 각 지역 사람들의 불균등한 시간감각을 초침이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600여개 시계 설치물로 풀어낸 이 작가의 <프로퍼타임>은 외국 언론과 전문가들로부터 한국관의 최고 수작으로 거명됐다. 실제로 한국관은 서구 미술매체인 <아트뉴스페이퍼> <아르트리부네> 등에 ‘주목할 국가관’으로 뽑혔고, <프로퍼타임>은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리뷰에 비엔날레 대표작으로 사진과 함께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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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스튜디오 얼개로 파격적 변신을 감행한 프랑스관 전시장. 세계적인 영상작가 크리스천 마클레이와 조각가 그자비에 베양이 협업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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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시각효과 강조한 본전시 옛 조선소 터 아르세날레 지구와 공원 안 옛 이탈리아관에 차려진 본전시는 전통, 샤먼, 지구 등 9개 세션으로 꾸린 미술여행 형식으로 등장했다. 힐링, 시각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다수 나와 잔잔하면서도 유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특히 샤먼과 전통 개념의 섹션 쪽 수작들이 도드라졌다. 브라질 작가 이르네스투 네투는 아마존 식물덩굴들로 거대한 그물망을 짠 집에 쉼터를 마련했다. 아마존강 유역 인디오들의 제례터를 빌려와 관객들이 안에서 대화하거나 휴식하면서 치유와 위안을 받는 힐링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리움에서도 전시한 올라푸르 엘리아손은 본전시관 한가운데에 작업생산기지를 차려놓고 생태친화적인 녹색 램프를 관객과 함께 만드는 워크숍을 꾸려 발길을 불러 모았다.
본전시에 참여한 한국 작가 이수경씨는 도자기 파편들을 이어 붙인 높이 5m짜리 조형물 <신기한 나라의 아홉 용>을 내놓았다. 무한증식하는 듯한 도자기 파편들의 결합물을 중국 용 설화에서 착안한 이야기들의 덩어리로 빚어낸 작품이었다. 11일 카스텔로 공원 진입로에서 작가가 연출한 퍼포먼스 ‘태양의 궤도를 따라서’도 한국 무속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통복식, 춤, 음악에 보디빌딩, 현대음악이 어우러진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또다른 한국 작가 김성환씨의 <굴레 이전의 사랑>은 흑인 청소년과 자신의 어린 여조카 등 약자들이 차별의 굴레 속에서 겪는 고통과 감성 등을 시적인 영상으로 담아냈다. 전시를 살펴본 중견기획자 김승덕씨는 “지난 20여년간 비엔날레들이 난립하면서 담론 자체가 진부해져버렸는데, 올해 비엔날레는 새로운 활로를 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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