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01 08:00
수정 : 2017.06.0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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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카르티에 소장품전 2층 전시장에 나온 오스트레일리아의 현대미술가 론 뮤익의 설치작품들. 작가는 나뭇가지를 들거나 침대에 누운 여인을 극사실주의풍으로 과장되거나 축소된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기괴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과 삶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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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카르티에 소장품전’
현대미술 대가들과 협업한 일급소장품 100여점 선보여
론 뮤익·박찬욱·박찬경·데이비드 린치 등 이색 작품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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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카르티에 소장품전 2층 전시장에 나온 오스트레일리아의 현대미술가 론 뮤익의 설치작품들. 작가는 나뭇가지를 들거나 침대에 누운 여인을 극사실주의풍으로 과장되거나 축소된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기괴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과 삶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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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현대미술의 매혹이다!’
대가의 작품들은 관객 앞에서 한목소리로 외치는 듯하다. 이불 작가의 먹물 욕탕과 장미셸 오토니엘의 에로틱한 유리알, 혹성 탐험 판타지를 담은 뫼비우스의 애니메이션, 데이비드 린치의 속내를 까발린 석판화 등이 줄줄이 나오는 전시장. 프랑스 보석상 명가 카르티에가 펼쳐놓은 현대미술품 컬렉션은 거대하고, 휘황찬란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풀코스 만찬처럼 다가온다.
30일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1~3층 전관에서 개막한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하이라이트’는 현대미술의 매혹을 제대로 맛보는 기회다. 카르티에와 미술관이 함께 기획한 이 전시는 애호가는 물론 일반 관객의 호기심도 끌어낼 만한 덩치와 내력을 갖춘 수준급 작품들로 꾸려졌다. 1984년 재단 설립 이래 세계 각지 주요 미술가들에게 과업을 주고 협업해 완성품을 전시한 뒤 소장해온 컬렉션 1500여점 중 알짜 작품 100여점을 선보이는 아시아 순회전 첫 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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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전시장에 선보인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석판화 드로잉 연작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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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 22명과 세 팀이 내놓은 출품작들은 난해하거나 보기에 피곤하지 않다. 회화, 비디오아트, 사진, 판화, 조각 같은 다장르 작품을 널찍한 공간에 작가별로 배치했고, 그 사이를 명료한 동선으로 연결해 작품마다 개성과 취향을 쉽게 느낄 수 있다.
2층 입구에 쓰인 “당신이 방문하는 순간 우주와의 대화가 시작된다”는 러시아 수학자의 경구처럼 출품작들은 지구와 우주, 일상에 관한 다양한 소재와 화두를 품고 있다. 특히 도드라진 작업이 지구의 인구·생태·언어 문제 등을 다룬 거시적 의제의 탈경계적 영상물들이다. 미국 음악인 버니 크라우스와 영국의 아트스튜디오 유브이에이(UVA)가 공동작업한 3층의 대형 설치영상작업 <위대한 동물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지구촌 7개 지역에 사는 각 동물들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그 소리들의 율동을 기록한 음향 그래프선의 움직임과 화면 자체가 이동하는 구도를 통해 지구촌의 놀라운 음향적 비경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미술가와 건축가 그룹인 딜러 스코피디오 렌프로의 ‘출구’(EXIT·1층)도 놓칠 수 없는 영상물이다. 세계 각지의 인구이동 통계를 담은 빅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영상그래픽화한 이 작품은 세계 지도상의 인구 이동을 마치 액체가 분출하는 듯한 동영상으로 구현하며 세계화의 실상을 박진감 넘치게 전달한다. 반면, 여인상을 극사실적으로 과장하거나 왜소하게 빚어내며 일상에 대한 새로운 눈길을 권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가 론 뮤익의 설치작품과 깨지기 쉬운 사랑의 감정을 에로틱한 색조의 유리알과 황 덩어리로 표현한 장미셸 오토니엘의 조형물은 미시적 소재에서 극대, 극소의 미학을 풀어내고 있기도 하다.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만든 장르 융합적 작품도 감상의 별미다. 영화계의 거장 데이비드 린치가 석판화와 바인딩 첩으로 제작한 반추상화한 인물이나 사물, 현상들에 대한 드로잉들은 섬세한 작가의 의식 세계를 속속 탐색하게 하는 내시경 같은 작업들이다. 대중음악 스타 패티 스미스가 친구인 사진가 메이플소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자작시 ‘산호초의 바다’를 내뱉으며 만든 물결 프로젝션 영상은 검은색 베일과 어우러져 감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박찬욱·박찬경 형제 감독이 꾸린 팀 ‘파킹찬스’는 박찬욱 감독이 17년 전 만든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촬영에 쓰인 판문점 세트장의 철거를 앞둔 풍경을 3D 영상으로 찍고 입체적인 소리까지 넣어 분단 현실에 대한 낯설게 보기를 이끈다. 일본 거장 기타노 다케시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동물 모양의 꽃병 연작에서는 기발하고 유쾌한 그만의 조형감각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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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로비 공간에 선보인 선우훈 작가의 웹툰 작품 ‘가장 평면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의 한 장면. 오늘날 한국 상황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정치적 공간의 단순화한 웹 이미지와 그에 얽힌 대화창으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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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장사를 하는 기업이 경매가 아니라, 20년 이상의 장기 기획으로 선택한 작가들이 꾸준히 신작을 만들게 하고 컬렉션 순회전을 차린다는 발상은 카르티에 특유의 안목과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시각예술을 확장하고 대중간 소통을 중시한다는 컬렉션 철학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국공립 미술관을 능가하는 상업자본 컬렉션에 들어온 작품들이 대부분 저항성과 야성이 소거된 채 반듯이 정제되어 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철학자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통찰했듯, ‘숭고함’을 잃고 전율과 경악 대신 매끈해진 외형과 만족스런 소통만을 내세우는 또다른 획일성이 출품작들 속에 어른거리는 까닭이다. 무료. 8월15일까지. (02)2124-88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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