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2 15:49
수정 : 2017.08.0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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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나온 알렉스 베르헤스트 2013년작 애니메이션 <저녁식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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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작가 베르헤스트의 디지털애니 <저녁식사>
조문기 작가와 함께 여는 색다른 2인전 ‘기묘가족’
옛 성화·16세기 플랑드르 명화 차용…현대가족 실상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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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나온 알렉스 베르헤스트 2013년작 애니메이션 <저녁식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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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만씨에게 전화를 걸어주세요…070-4515-6150.’
캄캄한 지하 전시장. 깊숙이 놓인 탁자 위에서 이 쪽지를 읽고 휴대폰 번호를 눌러본다. ‘딸깍’ 연결음이 들리고, 곧장 눈앞 화면에서 기괴한 대화놀이가 시작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등장인물 같은 구도로 식탁 위에 앉거나 서있던 가족들이 입을 비쭉거리며 서로 잇닿지 않는 대사를 뇌까린다. “누구야?” “전화….” “난 아냐.” “난 여기 있어.”’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우리 이제 식사하는 거야?”
들어보니 대화가 아니다. 모두 자기가 하고싶은 말만 내뱉을 뿐이다. 도저히 말로는 풀리지 않는 소통의 격벽이 들어찬 장면들의 연속이다. 요즘 전 세계 미디어예술계에서 각광받는 벨기에 작가 알렉스 베르헤스트(32)의 화제작 <저녁식사>는 이처럼 독특한 형식과 내용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서울 삼청동 바라캇 갤러리 지하공간에서 상영 중인 이 작품은, 가상의 가족을 설정하고 가장이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이 느끼는 불안과 상실감, 갈등을 다루고 있다. 현대가족의 공허한 실상과 소통 단절을 다룬 내용과 더불어 작가의 출신지인 플랑드르 지방의 과거 바로크 그림들을 새롭게 갈무리한 듯한 영상의 회화적 매력이 강렬하다.
플랑드르 일대는 16~17세기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같은 인물유화나 ‘바니타스’라고 불리는 정물화로 서구미술사에 획을 그은 곳이다. 작가는 플랑드르 회화의 섬세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도상학적 전통을 ‘움짤’ 같은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계승했다. 삶의 허무함, 죽음의 비의가 곳곳에 깃든 식탁 위의 음식과 곤충들의 미세한 동영상이나, 플랑드르 인물화의 신비감이 넘실거리는 인물들의 애니메이션도 눈힘 주고 볼 만하다.
이번에 함께 2인전 ‘기묘가족’을 꾸린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조문기(40) 작가 그림들은 명화의 차용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세부는 전혀 다르다. 르네상스 명화, 동유럽 성화 등에서 빌어온 듯한 이미지들로 가족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산문제 등으로 난장판이 된 가족 장례식장을 묘사한 대작 <상주와 함께>, 하체의 알몸을 드러낸 채 뒤엉켜 싸우는 두 남자들 옆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소녀를 그린 <은혜> 등에서 작가는 개인성을 짓누르는 현대 가족제도의 폭력성과 모순을 형상화했다. 이 그림들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17~19세기 러시아 성화도 출품작들 사이에 내걸려 전시장은 더욱 기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6일까지. (02)730-1949.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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