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25 17:52
수정 : 2017.09.2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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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무대에 올린 연극 <이방인>. 연극은 정확하게 살아가고픈, 정확하게 사랑받고픈 이들의 마음을 그려낸다. 극단 산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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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극단 산울림 ‘이방인’
소극장 장점 살린 원형무대서
‘절제된 뫼르소’ 연기한 전박찬
속내 드러내는 독백장면 백미
카뮈 소설 ‘오해’ 한 장면 삽입
작가가 던진 ‘진실의 가치’ 되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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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무대에 올린 연극 <이방인>. 연극은 정확하게 살아가고픈, 정확하게 사랑받고픈 이들의 마음을 그려낸다. 극단 산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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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첫 문장과 둘째 문장 사이 잠시의 머뭇거림은 있었지만, 슬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했다. 다정하지도 않았지만, 박정하지도 않은 말투였다. 그럼에도 그의 외모에서 묻어나는 다정함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연극 <이방인>의 주인공 전박찬의 뫼르소는 그랬다.
세계문학사에서 위대한 첫 문장 중 하나로 꼽히는 저 문장으로 시작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카뮈는 저 문장으로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는 동시, 선배 문학의 종언을 고했다. 뫼르소의 등장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과도 같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전대미문의 인물형이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어머니를 땅에 묻는 순간까지 뫼르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심지어 상을 치른 다음 날, 그는 회사 여직원을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대낮에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를 총으로 살해한다. 소설 <이방인>은 이 일로 인해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아 수감된 이후까지 다룬다.
극단 산울림의 158회 정기공연 연극 <이방인>은 원작 소설의 구조를 충실히 따른다. 소설이 뫼르소의 시점으로 전개되듯, 연극 또한 뫼르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대사의 절반 이상이 뫼르소에게 할당되어 있다. 다른 배우들이 1인 2역 이상을 소화하며 등퇴장을 거듭하는 순간에도 뫼르소는 무대를 지킨다. 과장한다면, 뫼르소의 모노드라마라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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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연기한 배우 전박찬. 극단 산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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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배우들의 존재감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들의 존재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재판 장면이다. 전박찬을 제외한 여섯 배우들은 원형무대를 돌며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을 연기한다. 배우 박상종, 승의열, 박윤석 등은 판검사, 변호사 외에 증인 역까지 1인 2-3역을 소화하는데, 찰나의 연기변신을 보는 건 <이방인>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원형무대와 1인 다역의 장점을 살린 연출의 재기가 발휘된 장면이다. 소극장 연극의 한계가 연극만의 미학으로 전환된 장면이다.
소설을 고스란히 옮겨놓았지만, 이 연극에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이 연극에는 카뮈의 다른 소설인 <오해> 속 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독방에 수감된 뫼르소는 어느 사업가의 사망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를 읽는다. 고향을 떠나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다. 가족을 놀라게 할 생각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어머니와 누이가 운영하는 여관에 투숙한다. 그날 밤, 돈에 눈먼 가족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한다. 뒤늦게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가족은 목을 매 자살한다. 카뮈는 이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오해>를 완성했다. 각색을 겸한 임수현 연출은 이 장면에서 원작에 없던 <오해> 속 누이의 독백을 더했다.
그러나 연극의 백미는 수감된 뫼르소의 독백 장면일 것이다. 다정하면서도 무정한 뫼르소의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으로, 배우 전박찬의 외모에 연기력이 더해지면서 시너지가 반짝이는 순간이다. 이쯤에서 뫼르소에 대한 카뮈의 설명을 더해야겠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은 은폐하지 않는다. (……)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전박찬의 뫼르소는 자신의 정확한 감정을 찾으려는, 그 이상의 과도한 표현을 절제하려는 인간이었다.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부재할지라도, 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스스로에게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인간. 객석 한두 군데서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나온 건, 정확하게 살아가고픈, 정확하게 사랑받고픈 이들의 신음이 아니었을까. 연극 <이방인>은 서울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에서 10월1일까지 공연된다.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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