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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0.29 10:32 수정 : 2017.10.29 10:50

[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 드로잉
④ ‘나’의 의미

사소한 것만 같던 내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경험은
내 삶을 더욱 살찌운다
삶은 즐거움이다
찾고 만들어야 하는 즐거움이다

국도예술관. 2015.7. 펜, 색연필. 26×21㎝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부산의 ‘바다무대’라는 동호회에 소속돼 많은 연극과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뮤지컬보다는 그래도 가격이 저렴한 연극을 더 선호하는데, 소극장의 작은 무대, 바로 내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에너지와 열정이 너무나 좋았다. 같은 작품을 두 번 세 번 보기도 했고, 더블캐스팅 때문에 같은 역의 다른 배우들 연기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 번씩 서울로 원정을 가서 작품을 서너 편씩 몰아보고 내려오곤 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러가진 않고 1년에 두세 편 정도 보게 된다.

짝지나 나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멀티플렉스관에서 보고 싶은 영화는 조조로 챙겨 보기도 하고(요즘 영화값이 너무 올라서 조조 시간이 아닌 때에 영화 보는 것이 참 부담스럽다), 인디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부산 국도예술극장에서 영화를 두 편 정도씩 몰아 보기도 한다.(내가 사는 양산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가 있다 보니 한 편만 보고 오기엔 좀 부담스럽다. 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기에 두 편 정도 연달아 보고 오는 편이다.)

요즘은 무엇을 관람하고 구경하는 형태보다는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참여자로 함께하는 모임들이 좋다. 영화나 연극 관람도 주체적인 형태의 문화 소비이긴 하지만, 비용을 무시하기 힘들고 창작자가 만든 것을 내가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보다는 내가 직접 참여해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내 의견을 말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그리고,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 형태의 작은 모임들이 지금은 더 좋아졌다.

문학의곳간. 2017.8. 펜, 마카. 15×20㎝
부산의 생활예술모임 ‘곳간’에서는 ‘문학의 곳간’이란 모임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소설이나 시집 한 권을 읽고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평범한 자기소개를 하는 대신 ‘사귐의 시간’을 갖는데, 진행자가 공통의 질문 하나를 던지면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을 돌아가며 천천히 풀어 놓는다. 작품과 연결된 질문인 경우가 많은데, 죽음이 소재가 된 소설집에서는 ‘자기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경험’, ‘자신의 노후는 어떤 모습일까?’와 같은 질문에, 음식이 소재가 된 문학작품일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단골집은?’ 등의 질문에 대답을 찾게 된다.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사귐의 이야기만으로도 모임을 함께하는 시간이 풍족해지기도 한다. 나이가 몇 살이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서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두런두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3~4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린다. 책을 읽어 와야 하고 모임이 3~4시간 걸리다 보니 참여 인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작은 인원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이 편하고 즐겁다.

자클린 밀드레드씨. 2017.6. 펜, 색연필. 15×20㎝
지난해엔 양산 다문화센터에서 국제결혼을 하신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상드로잉 수업을 했는데, 내 수업을 들었던 한 분이 모임을 주관해 주셔서 한 달에 한 번 ‘양산스케쳐스’라는 모임도 함께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다 보니 어떨 땐 아이들 맡길 데가 없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림을 그리느라, 모임에선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그림 그리고 수다 떠는 그 시간이 참 행복하다. 보통 때는 카페에 모여 각자 그림을 그리고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구경하고, 날씨가 좋은 계절엔 야외 스케치를 함께 나간다. 한 달에 한 번인 이 모임에도 소수의 고정멤버가 있고, 적을 때는 서너 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앞으로 그리 돈을 많이 벌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더 큰돈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작은 모임들의 존재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요즘의 문화들은 대부분 소비를 바탕으로 지속되는 형태라,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으면 문화생활마저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소수에 해당해 늘 돈을 쓰며 문화를 소비했던 사람들도 실은 돈이 없으면 일상을 즐기며 함께할 방법을 잘 모른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일생 동안 내내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수입은 줄어들고 시간은 많아진다. 일상을 소비적으로만 즐겨오던 사람들에겐 그 많은 시간은 불안과 공허함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외 스케치. 2017.3. 펜, 수채화. 42×15㎝
그래서 시간을 잘 쓰는 법을 배우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는 훈련을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동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모임을 꾸준하게 해 보면, 내 삶에 대해 관심도 생기고 모임 속에서 타인과 관계하는 법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모임에 참여자로만 참석하지만, 점점 내가 하고 싶은 모임도 구상하고 함께할 사람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모임을 꾸리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 과정이 이미 ‘재미’이며 삶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물론 참석인원들의 참여율이 떨어지면 주최자로서 괜히 섭섭해지기도 하지만. 그러면 다시 또 타인의 모임에 참여해보고 다른 형태의 나만의 모임을 구상하며 자연스레 사람들 속에 관계하고 배워가는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작은 모임들을 많이 해보면, 아주 사소한 주제로도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소한 것만 같던 내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경험은, 내 삶을 더욱 살찌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일상의 풍요가 나를 건강하게 지키는 힘이 된다. 서로의 가진 것을 비교하고, 서로가 누리는 것들을 부러워만 하면서 우린 너무 스스로를 불안과 박탈감에 내몰고만 있진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 내가 있는지, 혹시 눈을 현혹하는 것들로 인해 ‘나’는 지워지고 없는지. 삶은 즐거움이다. 찾고 만들어야 하는 즐거움이다.

무극성 프로그래머. 2015.9. 펜, 색연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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