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 드로잉⑥ 일상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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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수업. 2017.8. 붓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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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드로잉 작업을 해오고 있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일상드로잉 작가로 나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지만, 내 작업들이 특별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연습장이나 양쪽으로 펼쳐지는 노트를 늘 가지고 다니다가 시간이 날 때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둔 사진들 중에서 맘에 드는 장면을 골라 그린다. 30분에서 1시간30분 정도 간단히 그린다. 채색도 다양하게 할 줄 몰라서, 색연필로 간단히 채색하거나 마커로 칠하는 정도이다. 수채화도 제대로 배우고 싶어 동네 작은 미술학원에서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적엔 만화책 같은 걸 보고 많이 따라 그렸다.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어서 나름 인체 공부를 하고, 열심히 그려보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이가 들고 직장에 다니며 먹고살다 보니 그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아내, 그러니까 짝지(‘짝지’라는 말은 ‘지팡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를 만났다. 연애 초기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짝지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짝지가 그 그림을 너무나 좋아했다. 내가 봐도 그때 그 그림은 참 마음에 든다. 그 뒤로도 짝지는 종종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억지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연애 초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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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초기 축구 시청. 2011.6. 펜.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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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림을 보면 지금 그림과 참 많이 다르다. 간단한 그림들이다. 무엇을 그리든 짝지는 늘 맘에 들어 하며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내가 일상드로잉을 시작하는 데 칭찬의 힘은 정말 컸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드로잉 수업에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칭찬할 부분을 먼저 찾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각자의 그림이 가지는 매력이 있고, 그 매력들을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지속적으로 발견해주면 어느새 자신의 그림이 예뻐 보이게 마련이다. 나도 처음에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못 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짝지가 자꾸 칭찬을 해주니 ‘그런가?’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 일상드로잉이 시작되었다.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림을 그렸는데, 나는 칭찬받고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회사에 다닐 때는 노동 현장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만나는 친구들, 내 주변의 사물과 풍경들도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다. 자존감이 낮은 편이었는데, 나를 둘러싼 것들을 발견하고 그림으로 옮기니, 내 삶을 긍정하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가 관심 가지는 것들,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응원을 받고, 그 응원을 돌려주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그림 그리는 일은 힘들고 어렵지만, 나는 내 주변을 돌아보고, 서로 주고받는 마음들을 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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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 사장방. 2012.6. 볼펜.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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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속 그리다 보니, 이런 방식으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일상드로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드로잉 작가로 활동하고 계신 이상진 작가님을 서울에서 만나고 오니 주눅 들기도 했지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몰라도 나도 드로잉 수업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 생겼다. 겨우, 지난해의 일이었다.
드로잉 수업이란 걸 처음 시작했을 땐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하는 회의감도 들고 정말 ‘멘붕’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일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타인에게도 그들의 일상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뿌듯하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수업을 진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주말에 시간을 내어 수업을 하나씩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올해 예상치 못한 삶의 전환기를 맞아(‘박조건형의 일상드로잉’ 1회 참조), 전업 드로잉 작가로 살아보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일상을 그린다는 일,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한다는 일,
책 한 권으로 묶이지 않아도
그 시간들은 충분히 근사하다
끝까지 살아내는 우리들의 일상이
이미 근사한 작품인 것처럼
내가 하는 수업 과정에 관해 말하자면, 내 수업은 기초 4주와 인물드로잉 4주, 총 8주의 길지 않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누구든 일상드로잉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 혹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면서 시간을 내어 그림 그리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 않다. 시중에 드로잉 교재들이 참 많은데, 어느 책이든 대부분 매일 30분만 그리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보통 결심이 아니고서는 매일 30분씩 그림을 그리는 일조차 상당히 어렵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림 그리는 행위를 즐기거나 의미를 찾지 않으면 그림을 ‘계속’ 그리기는 힘들다. 그림을 그린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행히 드로잉 수업으로 생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취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서 그리지 말고 함께 그림 그릴 사람을 찾거나 동호회나 야외 스케치 모임들을 찾아서 그림 그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하도록 권유를 하는 편이다. 의지가 약한 우리는 그런 외부의 조건들을 갖추지 않고는 꾸준하게 오래 그리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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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활유 제재소. 2012.7. 펜. 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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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 선반. 2013.12. 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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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그리긴 힘들겠지만, 2주에 한 번이나 3~4주에 한 번 정도는 그리고 싶은 마음을 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꾸준하게 계속 그리면 실력은 분명 늘어난다.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그리면 된다. 나도 지금은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보다 자주 그리고, 그림도 조금 더 나아졌다. 나보다 그림 잘 그리고 성실하게 작업하시는 작가분들도 너무 많지만,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속도로 그리면 된다.
일상을 그린다는 일,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한다는 일, 액자 속에 전시되거나 책 한 권으로 묶이지 않아도, 그 시간들은 충분히 근사하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우리들의 일상이 이미 근사한 작품인 것처럼.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나도 계속 그리다 보면 만족하는 그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까? 어쩌면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그렇게 나를 믿어본다. 느슨하게,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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