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6 17:37
수정 : 2017.11.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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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소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연극으로 만들어져 2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마음 속 말들을 방백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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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당신이 알지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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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소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연극으로 만들어져 2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마음 속 말들을 방백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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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읽었던 소설의 대부분은 공교롭게도 상실 이후의 삶을 다룬 것들이었다. 그중에 권여선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있었다. 당신이? ‘당신은’이 아니라? 저 주격조사 ‘이’는 과속방지턱처럼 독서를 멈추고, 순간 멈춰 생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이야기는 여고생 혜언(혜은)이 살해된 2002년 시작된다.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은 동급생인 금수저 신정준과 흙수저 한만우.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증인이 충분했던 신정준은 일치감치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한만우도 결국 증거부족과 살해동기 부족으로 풀려났다. 그렇게 사건은 미제로 종결된다. 이후 작품 속 시간은 2006년, 2009년, 2014년, 2015년, 2016년, 몇 년씩 쑥쑥 뛰어넘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진범을 찾아내 복수하려는 피해자의 동생 다언이다. 수소문 끝에 다언은 사건 이후 종적을 감춘 한만우를 찾아낸다. 거기서 다언은 육종으로 한쪽 다리를 잘라낸 한만우와 마주친다. 한만우는 어떻게 될까? 나중에 다언은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 가서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불구의 몸으로 의병전역을 하고 장애인 고용법으로 세탁공장에 겨우 취직해 화상을 입으며 다림질하다 골육종이 온몸에 퍼져 스물여덟에 죽어요. 그런데도 이걸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일 모두가 신의 섭리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난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돼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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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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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흘려 보았던 문장이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한 단어 한 단어에 밑줄이 쳐졌다. 불타는 망루, 침몰하는 배. 무엇보다 무지한 신. 여기서 제목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 풀린다. ‘당신’은 ‘신’이었을까. 주격조사 ‘은’ 대신 ‘이’를 사용한 건, 알아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것을 소홀히 했던 절대자에 대한 책임 추궁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연극은 활자로는 놓칠 수 있는 것들을 보이고 들리게 만든다. 무대부터 그렇다. 강철 재질로 만들어져 좌우로 약간 틀어진 무대 바닥은 인물들의 위태로운 상황과 날카로운 심리적인 상황을 은유한다. 무대 위에 놓인 각기 다른 모양의 의자 9개는 극중 인물의 다양한 캐릭터를 암시한다.
무엇보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전달 방식에 있다. 보통의 연극들이 대화의 연극이라면, 이 연극은 방백의 연극이다. 연출가 박해성은 대부분의 대사를 방백으로 전달해 작은따옴표 안에 묶일 만한 마음속 이야기들을 표현한다. 소설을 온전히 풀어내는 방법으로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원작과 다른 점도 있다. 소설이 진범의 몽타주를 세밀하게 묘사한다면, 공연은 단지 실루엣만 보여준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다른 진범을 품고 극장을 나선다. 하긴, 이 작품에서 누가 진범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건, 모든 걸 알고 관장해야 할 누군가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의무를 방기한 그를 대신해 복수를 실행하는 건 혜언의 가족이다. 망자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망자의 유족으로서 자신이 받은 고통과 똑같은 등가의 고통을 안겨준다. 가장 정확한 복수의 방식이다. 12월3일까지 남산예술센터.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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