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김수철이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전통음악과 클래식이 상업적인 음악에 밀려나는 현실에 깊이 우려했다. “너무 상업적인 소리에 치우치다 보면 감동을 주는 소리가 없어지죠.”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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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대학1학년 때 밴드로 방송 데뷔
4학년 때 영화음악 맡아 국악공부 시작
84년 가수왕 오른 뒤 국악현대화 실험 ‘아이돌판’ 가요만 빼고 여러 장르 작곡
“늘 사람들 곁에 건강한 소리 머물기를” 실제 그는 1984년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조용필을 제치고 가수왕이 되고 나서 3년 뒤 첫 국악음반 <0의 세계>를 냈다. 그리고 2년 뒤 국악 2집 <황천길>을 냈다. 녹음 비용은 모두 그가 댔다. 가수왕이 됐으니 가능했다. “지금껏 국악 음반을 25장 정도 냈어요. 적자를 면한 건 <서편제 오에스티>뿐입니다. <0의 세계>는 딱 575장 팔렸죠.” 1989년 ‘정신 차려’가 수록된 가요음반 <원 맨 밴드>를 낸 것도 국악 앨범 때문에 진 1억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는 광운대 1학년 때인 1977년 대학 밴드 ‘퀘스천’ 멤버로 방송에 출연한 것을 음악 인생의 기점으로 삼는다. 국악과 만난 건 4학년이던 1980년이었다. 소형 영화 <탈> 음악을 국악 형식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바로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 “<춘향가> 엘피판을 졸려도 계속 들었어요. 2년 6개월을 들으니 졸지 않게 되더군요.” 당시 전기기타를 가지고 한 국악 실험은 1986년 그가 이름을 붙인 ‘기타산조’라는 새 음악 장르로 태어났다. 1989년 대한민국무용제에선 국악을 현대화한 <불림소리>로 음악상을 받았다. 대중음악 작곡가로는 첫 수상이었다. “5년 전에 서울대 법대 교수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불림소리를 들려준 뒤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우리 소리와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연 가능성을 실험한 곡이죠.” <팔만대장경>(1988)과 지금껏 두 편이 나온 <불림소리>를 죽을 때까지 시리즈로 작곡할 생각이라고 했다. “팔만대장경 수장고에 들어갔었죠. 깊은 기가 ‘어’ 하고 오더군요. 그때 술담배를 끊었어요. ‘감각이나 감성, 머리로 곡을 만들어선 안 되겠다. 작곡 자세가 올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팔만대장경 작곡 이후로 제 음악이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 소리에 대한 열정은 대형 국가 행사의 음악 작곡으로 이어졌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김수철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껏 들었던 가장 좋은 소리가 뭐냐고 물었다. “가장 좋은 소리 역시 감동적인 소리죠. 제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소리는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천년학’ ‘치키치키차카차카’ 그리고 월드컵 개막식 음악입니다.” 10년 전엔 음악 인생 30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 차례 했었다. 올해 40돌 기념 공연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만든 소리의 정수를 꽉꽉 채워 보여주는 대형 공연을 하고 싶은 맘은 있다. “수익에만 연연하지 않는 파트너(협찬사)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타산조를 포함해 우리 음악을 외국에 알리는 ‘문화사절단’ 기획에 대한 꿈도 내비쳤다. “일본은 가부키가 있지만, 우리 순수예술 가운데 외국에 널리 알려진 게 없어요. 한류가 잘됐을 때 순수음악도 밀어줘서 같이 가야죠. (우리 음악은) 너무 훌륭해요. 알리기만 하면 옵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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