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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30 18:49 수정 : 2017.11.30 21:33

[짬] 음악인생 40돌 맞은 가수 김수철

인터뷰를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김수철이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전통음악과 클래식이 상업적인 음악에 밀려나는 현실에 깊이 우려했다. “너무 상업적인 소리에 치우치다 보면 감동을 주는 소리가 없어지죠.”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천재, 안타깝다, 돌아오라.’ 가수 김수철(60)이 작곡한 영화 <서편제>(1993)의 메인 테마곡 ‘천년학’의 유튜브 댓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반응이다. 김수철은 올해도 <에스비에스> 드라마 <우리 갑순이> 주제곡을 만들었고, 세 편의 영화 음악 작곡 요청도 받아놓고 있다. 이런 활동에도 대중들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방송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기 힘든 탓일 것이다. 가요 앨범도 2002년 이후 나오지 않고 있다. 그가 최근 음악 인생 40년을 정리한 회고록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까치 펴냄)를 들고 대중 앞에 나타났다.

지난 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수철에게 먼저 근황을 물었다. “가요만 빼고, 무용·드라마·영화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가요는 아이돌 분위기여서 신곡을 내도 홍보가 마땅치 않아요. 어떻게 내야 할지 루트(길)도 모르고요.” 대학 때 작은거인밴드로 냈던 곡들을 10년 전에 록 버전으로 다시 썼단다. 음반으로 내고 싶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김수철은 책에 “나는 늘 사람들 곁에 건강한 소리가 머물기를 원한다”고 썼다. 실제 대중들은 그를 ‘못다 핀 꽃 한 송이’ ‘정신 차려’ 같은 가요로 기억하지만 그의 지난 40년은 ‘건강한 소리’를 만들기 위한 분투의 시간이었다. 그는 ‘건강한 소리’란 ‘감동을 주는 소리’라고 했다.

“베토벤 선생을 가장 좋아해요. 그의 교향곡, 특히 9번은 세월에 관계없이 지구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죠. 나도 한 곡이라도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곡을 만들고 싶어요.” 덧붙였다. “제 (가요) 노래를 들어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분들 때문에 제가 음악 공부를 하고 실험도 하고 녹음도 할 수 있었죠.”

‘작은 거인…음악 이야기’ 회고록 펴내
77년 대학1학년 때 밴드로 방송 데뷔
4학년 때 영화음악 맡아 국악공부 시작
84년 가수왕 오른 뒤 국악현대화 실험

‘아이돌판’ 가요만 빼고 여러 장르 작곡
“늘 사람들 곁에 건강한 소리 머물기를”

실제 그는 1984년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조용필을 제치고 가수왕이 되고 나서 3년 뒤 첫 국악음반 <0의 세계>를 냈다. 그리고 2년 뒤 국악 2집 <황천길>을 냈다. 녹음 비용은 모두 그가 댔다. 가수왕이 됐으니 가능했다. “지금껏 국악 음반을 25장 정도 냈어요. 적자를 면한 건 <서편제 오에스티>뿐입니다. <0의 세계>는 딱 575장 팔렸죠.” 1989년 ‘정신 차려’가 수록된 가요음반 <원 맨 밴드>를 낸 것도 국악 앨범 때문에 진 1억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는 광운대 1학년 때인 1977년 대학 밴드 ‘퀘스천’ 멤버로 방송에 출연한 것을 음악 인생의 기점으로 삼는다. 국악과 만난 건 4학년이던 1980년이었다. 소형 영화 <탈> 음악을 국악 형식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바로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 “<춘향가> 엘피판을 졸려도 계속 들었어요. 2년 6개월을 들으니 졸지 않게 되더군요.” 당시 전기기타를 가지고 한 국악 실험은 1986년 그가 이름을 붙인 ‘기타산조’라는 새 음악 장르로 태어났다.

1989년 대한민국무용제에선 국악을 현대화한 <불림소리>로 음악상을 받았다. 대중음악 작곡가로는 첫 수상이었다. “5년 전에 서울대 법대 교수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불림소리를 들려준 뒤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우리 소리와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연 가능성을 실험한 곡이죠.”

<팔만대장경>(1988)과 지금껏 두 편이 나온 <불림소리>를 죽을 때까지 시리즈로 작곡할 생각이라고 했다. “팔만대장경 수장고에 들어갔었죠. 깊은 기가 ‘어’ 하고 오더군요. 그때 술담배를 끊었어요. ‘감각이나 감성, 머리로 곡을 만들어선 안 되겠다. 작곡 자세가 올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팔만대장경 작곡 이후로 제 음악이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 소리에 대한 열정은 대형 국가 행사의 음악 작곡으로 이어졌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김수철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껏 들었던 가장 좋은 소리가 뭐냐고 물었다. “가장 좋은 소리 역시 감동적인 소리죠. 제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소리는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천년학’ ‘치키치키차카차카’ 그리고 월드컵 개막식 음악입니다.”

10년 전엔 음악 인생 30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 차례 했었다. 올해 40돌 기념 공연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만든 소리의 정수를 꽉꽉 채워 보여주는 대형 공연을 하고 싶은 맘은 있다. “수익에만 연연하지 않는 파트너(협찬사)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타산조를 포함해 우리 음악을 외국에 알리는 ‘문화사절단’ 기획에 대한 꿈도 내비쳤다. “일본은 가부키가 있지만, 우리 순수예술 가운데 외국에 널리 알려진 게 없어요. 한류가 잘됐을 때 순수음악도 밀어줘서 같이 가야죠. (우리 음악은) 너무 훌륭해요. 알리기만 하면 옵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는 1985년 아버지 묘소 앞에서 “음악 공부도 공부니까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기억이 있다. 부친은 1984년 별세 전까지 아들이 음악 대신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 요즘 어떤 공부? “그건 말 안해요. 미리 말하는 것을 싫어해요. 공부는 많이 해야 하고 결과는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천년학’은 불과 25분 만에 만들었다. 이런 그에게 천재란 소리가 붙는다. “그런 창작은 드물어요. 천년학도 앞서 5개월 동안 궁리했으니 25분 만에 나왔죠. 사람들은 천재란 말을 좋아하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는 잘 안 봐요. 전 지금껏 놀러 외국 여행을 가거나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어요. 늘 마지막처럼 작곡해요. 곡이 한번 틀어지면 금방 소문이 납니다. 더 이상 작곡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요. 그래서 최선을 다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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