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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12 05:01 수정 : 2017.12.12 20:40

2016년 머리카락을 붙여 만든 대작 <내땅을 딛고 서서>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황재형 작가. 그는 자신이 물감 대신 쓰는 머리카락을 두고 “우리 몸을 드러내며 우리 삶의 전부를 보여주는 정직한 재료”라고 했다.

황재형 개인전 ‘10만개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붓질 삼아 빚어낸
탄광촌 사람들의 삶과 풍경

태백서 30년 ‘현장 리얼리즘’
“색과 결, 탄성이 다른 머리카락
회화적으로도 흥미로운 소재”

2016년 머리카락을 붙여 만든 대작 <내땅을 딛고 서서>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황재형 작가. 그는 자신이 물감 대신 쓰는 머리카락을 두고 “우리 몸을 드러내며 우리 삶의 전부를 보여주는 정직한 재료”라고 했다.
귀신이 부린 붓질이 이런 것일까. 뭉치고 흩어지는 머리카락들이 선이 되고 기운이 되어 수상한 세월 고단한 삶의 흔적들을 부여잡는다. 시골 언덕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태백역 플랫폼을 떠도는 사람들의 유령 같은 흔적들처럼.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최고봉에 올라선 태백 탄광의 화가 황재형(65)씨가 7년 만에 내놓은 신작들은 대부분 물감 없이 머리카락들만을 일일이 붙여 만든 것이다. 머리카락들은 서로 뭉치거나 쏠리면서 탄광촌 풍경과 사람의 손마디 같은 산줄기, 새벽에 넋두리하는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 야간작업 교대를 기다리는 태백 탄부들의 술렁거리는 표정들로 나타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4일 개막하는 황재형 개인전 ‘10만개의 머리카락’은 몸과 일체였던 머리의 터럭들을 매체 삼아 30여년 작업해온 강원도 태백 폐광촌과 현지 사람들의 삶을 빚어낸 작품들을 내놓았다. 전시장 전관에 걸린 20여점의 머리카락 작품들은 강렬한 선과 인간적인 온기, 생동하는 현장감으로 충만하다. 1980년대 이후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현장 리얼리즘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며 정점을 찍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떨어진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징그럽다거나 흉측하다는 혐오감 같은 게 있어요. 사실 한 사람당 10만개나 갖고 있고 매일 100여개가 떨어진다는 머리카락은 우리 몸을 드러내는 필름이지요. 남을 짓누르고 그 위에 내 행복을 꾸려나가는 인간 사회의 행태들이 더 흉측한데, 우리 삶의 전부를 다 보여주는 머리카락을 왜 꺼림칙하게 보나요?”

작가의 2017년 신작 <나한정에 부는 바람>(부분). 엉겨붙은 채 꿈틀거리거나 휘몰아치는 머리카락 선들로 정자 부근의 기운생동하는 풍경을 묘사했다.
익히 화단에 알려진 대로 황 작가는 태백에서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탄가루, 흙, 광부복 등 현장성 강한 소재를 물감과 섞어 막장의 삶을 그림으로 증거해왔다. ‘현장 속으로’를 구호로 내걸고 1982년 이종구, 송창 작가 등과 꾸린 민중미술 동인 ‘임술년’의 창립 멤버로서 탄광 노동자들과의 문화연대 활동과 주민들을 위한 미술교육 운동을 실천해온 그가 돌연 머리카락이란 소재를 탐색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2015년에 황혼이혼을 한 80대 여성의 젊을 적 고된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딸을 출산하고서 시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는데, 허연 머리카락 덩어리가 씹히더래요. 시어머니가 자기 머리카락을 넣어 심술을 부린 겁니다. 듣는 순간 전율이 일었어요. 아, 머리카락이 세상의 모든 위계질서와 삶의 불평등, 억압을 상징하는 물질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은 새로운 재료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집 안은 물론 태백시 곳곳의 이발소·미장원들을 돌면서 머리카락들을 모아 기존 유화 작업과 드로잉 선에 맞춰 접착제로 붙이는 작업이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육체적 곤경 속에서도 그는 머리카락이 지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성별·연령대에 따라 탄성과 결이 달라 회화적으로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나더군요. 민중들이 겪는 생활 현장의 내음이 가장 물씬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매력이었습니다.”

다른 맥락에서 주목되는 변화도 감지된다. 수년 전부터 그에게 화두로 등장한 불교사상과의 접목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이자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인 바이칼호 기행을 담은 대작은 분별심을 없애라고 강조하는 불가의 진여(眞如)사상이 깃든 걸작으로 꼽을 만하다. 흑연을 수백번 덧칠해 깊고 맑은 호수의 물비늘이 허연 빛을 내도록 묘사한 기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새벽녘 물비늘 일렁거리는 바이칼호 수면을 보니 내가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공허감이 밀려왔어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 자연 그대로의 심연과 침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 덧칠할수록 빛이 나는 흑연 재료를 생각해냈습니다.”

밑바닥 서러운 사람들에서 유라시아 대자연의 심원까지 영역을 넓혀온 그는 이제 어떤 구도행을 보여줄 것인가. 황 작가는 일단 바이칼호부터 태백에 이르는 아시아 한반도의 지리 자연기행을 수년간 벌일 참이라고 했다. 내년 1월28일까지. (02)720-102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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