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4 16:00
수정 : 2018.02.0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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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 서울에 차려진 정강자 회고전 현장. 전시장 바닥에 회고전을 맞아 재현된 정강자 작가의 옛 작업 <억누르다>(1968년)가 놓여 있다. 성질이 상반되는 재료인 솜과 철관이 어울린 설치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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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미술 여전사’ 정강자 회고전
지난해 타계 뒤 첫 전시회 열려
68년 한국 최초 누드퍼포먼스로 파격
옛 자료와 80년대 이후 회화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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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 서울에 차려진 정강자 회고전 현장. 전시장 바닥에 회고전을 맞아 재현된 정강자 작가의 옛 작업 <억누르다>(1968년)가 놓여 있다. 성질이 상반되는 재료인 솜과 철관이 어울린 설치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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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나의 시간은 상대가 느끼는 나의 시간과 다르다고 했다…수술 후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앞으로 더욱 빽빽한 삶을 살 것이다.”
위암으로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여성 전위예술가의 글귀가 유언처럼 읽힌다.
젊은 시절 ‘괴물’로 불리었던 작가 정강자(1942~2017). 1968년 5월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초유의 누드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로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선구자다. 정찬승, 강국진 등의 동료들과 ‘신전’ 동인을 결성하며 <한강변의 타살>(1968)과 같은 전위 퍼포먼스를 이어나갔던 그는 열정이 펄펄 끓는 여걸이었다. 자신의 몸을 재료 삼아 시대와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경직된 당대 사회에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를 전파하려 했다. <키스>(1968년), <여인의 샘>(1970년) 같은 조형물도 입과 가슴 등 여성성이 드러나는 몸 부위를 정면 부각시킨 기운 센 작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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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홍대 미대 재학 시절 실기실에서 작업 중인 정강자 작가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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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0년 정부 당국은 그의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을 강제로 막았다. 청년들을 상대로 장발 등 풍기문란 단속을 벌이게 된 계기가 정강자 퍼포먼스 탓이었다는 말들도 나왔다. 정강자는 작품 활동을 바로 접었고, 1977년 싱가포르로 이주하면서 미술판에서도 잊혀갔다. 1981년 귀국해 인도네시아 특유의 섬유그림 바틱 작업과 원, 한복 이미지가 아롱진 회화 작업들을 재개했지만, 세상은 그의 귀환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나온 자전 에세이 <화가 정강자 죽다, 살다>에서 작가는 회한이 스민 글귀를 남겼다. “투병에 있어 뚜렷한 ‘살아야 할 이유’만큼 강력한 항암제는 없지 않을까…평생의 작품 활동들에 대해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내 작품들에 대해 기존의 평론가들이 아니라 전세계 미술 대중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위해 나는 좀더 살아야 한다.”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과 아라리오 천안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회고전 제목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는 2015년 위암 수술을 받고 99일째 되는 날 작가가 그린 60호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기하학적으로 해체된 여성의 몸뚱어리가 사뿐히 하늘 위의 달로 비상하는 화폭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퇴폐작가’란 굴레를 씌운 이 땅의 시선을 벗어나 한계 없는 자유혼의 세상으로 비상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듯하다.
전시를 준비하던 작가가 타계하면서 첫 유작전이 되어버린 전시장의 애잔한 느낌은 조지아 오키프의 꽃그림을 연상시키는 68년작 <억누르다>의 재현품에서 더욱 커진다. 부드러운 꽃잎 모양의 솜 겹뭉치 위로 육중한 철관이 푹 내려앉았다. 자신의 삶을 짓눌렀던 남성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가 선뜩한 압박감의 덩어리로 물화된 모습이다. 그 음울한 분위기는 정강자에 대한 학계의 시선에도 드리워져 있다. 지금도 정강자 관련 논문이 한편밖에 없을 만큼 미술사적 재조명은 지지부진하다. 전시장엔 80년대 이후 회화를 위주로 60~70년대 전위미술에 얽힌 아카이브들을 곁가지처럼 배치해놓았다. 심층분석돼야 할 60~70년대 전위미술 작업 과정은 구석의 옹색한 아카이브 사진과 약력 소개 정도에 그친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셈이다.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25일까지, 아라리오 천안에서는 5월6일까지. (02)541-570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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