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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5 08:01 수정 : 2018.02.05 10:04

무대미술가 고 이병복.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무대미술가·명창·화가·사업가…
80~90대 여성 7인의 사진·구술영상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험난했던 시기 헤쳐온 역사 증언

‘나’를 놓지 않은 당당한 삶에서
‘진정한 나이듦’을 되돌아보다

무대미술가 고 이병복.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잠시 잊은 적은 있어도 잃어버린 적은 없다. 정신없이 헤매던 와중에도 놓아본 적은 없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 그렇다. ‘나’는 ‘나’를 두고 왔을 리 없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영숙 사진전 ‘여성 서사 여성 사물―두고 왔을 리가 없다’의 주인공은 여성 7명이다. 동갑이 세 쌍이나 된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영원한 연극계의 대모’ 이병복,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이 1927년 같은 해에 태어났다. 서호미술관 대표 이은주,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의 딸이자 배영환 삼화고속 회장의 부인인 박경애는 1934년생. 판소리 명창 최승희와 안동할매청국장을 수십년 운영해온 이상주가 1937년, 서양화가 김비함은 1929년생이다. 이들 모두 일제강점기, 분단과 한국전쟁, 군부정권 등 역사의 압착기에 개인의 운명이 내동댕이쳐진 험난한 시기를 헤쳐왔으나, 각자의 삶에서 공통분모를 뽑아내긴 쉽지 않다. 하지만 박영숙 작가의 카메라 앞에서 ‘나 여기 있다’고 증언하는 모습은 한결같이 당당하다.

박 작가는 최근 3년 동안 ‘여성 서사 여성 사물’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선배 여성들의 이야기를 채집했다. ‘찍기 싫다’고 손사래치는 이들을 달래가며 수십시간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전시회엔 각 인물의 사진 네다섯점과 10~20여분짜리 구술 영상이 나와 있다. 다양한 표정과 카리스마는 노인, 할머니 같은 ‘나이 규정성 단어’들을 잊게 만들고 호기심을 자아낸다.

고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이들에게 가장 강렬한 경험은 역시 한국전쟁이다. 전시회에선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병복의 구술채록집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2015년)를 보면, 그는 인민군의 서울 점령 당시 ‘좌익 친구’들이 마련해준 일자리(서울시인민위원회 문화선전선동부)를 얻었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명륜동 집 쪽마루 밑에 숨어 목숨을 보전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부산으로 피난 온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화가 권옥연과 결혼하고 미군 피엑스(PX)에서 일하며 디럭스 비누를 자루째 몰래 빼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김현경은 남편 김수영과 그의 친구 이종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괴로움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남편은 인민군에 징집되고 이종구와 함께 살던 그는 어느 일요일 “예쁘게 밥상 차려놓고 먹는데” 남편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아연실색하는 상황을 맞는다. 이은주는 남편이 징집을 피해 경북 영천의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애국가 3절까지 외워 쓰는 시험’을 통과해 국군 장교로 입대하기까지 애간장을 끓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안동할매청국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주.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박 작가의 적극적인 리액션에 힘입어 이들은 일과 사랑에 얽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을 털어놓는다. 이상주는 결혼 6년 만인 28살에 남편을 잃자 “부끄러워서” 3년 동안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시동생을 따라 강원도에서 식당을 하다 서울로 옮겨 성북동 터줏대감으로 지내고 있는 그는 “책 몇권 써도 모자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장사에다 마음을 붙이니깐 외로운 건 모르고 살았다”면서도 “젊었을 때는 굉장히 외롭고 쓸쓸했지”라고 되뇌고, “혼자 잘 살았다. 깨끗하게 살았으니깐”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연애라도 실컷 해봤으면 좋았겠다는 그런 생각 했었다”고 말한다.

서호미술관 대표 이은주.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이은주는 남편이 42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니가 나를 속일 줄은 몰랐다”며 목 놓아 우는 시아버지 앞에서 울지도 못했던 일화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여성들은 좀처럼 도전하지 않던 의과대에 입학할 만큼 재원이었던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시아버지의 후원을 바탕으로 1990년 인사동에 갤러리를 냈고 최근엔 경기도 남양주에도 미술관을 차렸다.

명창 최승희.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어려서부터 저 유성기 기계 속에 내 목소리가 들어 있길 바랐다”는 최승희 명창은 소리 배우는 댕기머리 소녀의 모습에 환장해 판소리에 발을 들여놓은 일, 정정렬에게서 <춘향가>를 배운 김여란 명창으로부터 7년 동안 소리를 배우다 스승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고 뛰쳐나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득음’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최승희의 답변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소리를 많이 하면 자기 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거야. 그 경지를 가야 혀. 폭포에서 피 토하며 득음한다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야. 폐병환자나 피 토하는 거지.”

‘나’를 놓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자 꿈을 품고 사는 것, 본질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화가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연출가 김정옥과 극단 자유(1966~2006)를 함께 꾸렸던 이병복은 “권옥연을 하나 키워냈고, 김정옥을 하나 키워냈다”는 평가를 자랑스러워하다가, 김정옥에게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열 받았던” 일화를 들려준다. “김 선생이 대표인 줄 알고 일본의 <요미우리신문>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내가 그랬지) 김 선생, 인터뷰 혼자 하러 다니지 마. 선물도 내가 사서 봇짐 꾸려서 갔는데 그거 들고 다니면서 혼자 인터뷰하지 마. 적어도 신문사하고 기자들하고 할 때는, 극단의 오래된 식구 다 데리고 가서 같이 앉아서 하자.” 수십년 전 일인데도 아직도 분이 안 가신 듯 격한 목소리다. 김수영이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평했던 김현경은 끓어오르는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종구와 김수영 둘 다 아니다, 나는 소설가로서 대성해야겠다는 야심을 품고 성북동에 혼자 방을 얻었어. 그런데 김수영, 이종구 두 남자가 다 그리워. 미치겠더라고.”

화가이자 패션디자이너 김비함.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이들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히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다. 서양화와 섬유를 전공한 김비함은 화가인 동시에 1968년 처음으로 연 패션쇼에서 ‘오리엔탈 노드-루크’라는 주제로 등이 다 보이는 롱 드레스, 보디페인팅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사진 속에서 김비함은 빨간 재킷과 청바지, 빨간색 로퍼 차림에 공들여 매니큐어 바른 긴 손가락을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앉아 있다.

박경애(오른쪽)와 남편 배영환 삼화고속 회장.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비평가 양효실은 이번 전시회에 대해 “나이듦은 계속되는 삶”임을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늙음은 두렵고 슬픈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앞으로 늙어갈 우리에게 이 영상은 늙은 여성들의 차이, 다양성, 여전한 사회적 역할을 통해 계속 살기를 자극한다.” 2월17일까지. (02)418-1315.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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