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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9 17:32 수정 : 2018.05.29 20:49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선보이고 있는 장민승 작가의 영상설치 작품 <사계>의 일부. 봉제사가 공업용미싱으로 천위에 노래 <사계>의 가사글자들을 한땀한땀 박아넣는 노동의 세부 과정을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담아냈다.

서울시립미술관 ‘씨실과 날실’ 전
창신동 봉제공장 노동자가 직접
‘사계’ 노랫말 새기는 장면 담은
장민승 작가 영상설치작 화제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선보이고 있는 장민승 작가의 영상설치 작품 <사계>의 일부. 봉제사가 공업용미싱으로 천위에 노래 <사계>의 가사글자들을 한땀한땀 박아넣는 노동의 세부 과정을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담아냈다.
무지막지한 미싱바늘의 율동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던가.

‘드르륵’ 기관총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렇게 굉음내며 살갗 같은 천자락 위를 초당 수십여차례 찔러댄다. 글자를 박는 공업용 미싱바늘의 숙명. 이 대물의 상하운동이 저속 화면으로 눈아귀에 잡힌다. 함께 귀를 메우는 건 차르륵’ ‘철커덕’ ‘위잉~’하는 기계음과 음울하고 비장한 음향들.

미디어아트 작가 장민승(39)씨가 만든 영상설치 근작 <사계>는 불과 10분의 상영시간인데도, 영상과 음향의 박진감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내용은 단순하다. 공업용 미싱으로 천조각에 글자를 박는 봉제사의 작업을 어두운 배경 속에서 클로즈업해 담은 것이다. 저속촬영으로 완충용스프링을 두른 미싱의 침봉이 여러가닥 실을 매달고 자수글자를 한땀한땀 새기는 장면을 주변 공기 흐름까지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포착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기계노동의 긴장감이 전달된다. 단짝으로 오랫동안 같이 작업해온 정재일 감독의 음악은 절묘하다. 영상에 증폭된 미싱의 기계음과 낮게 깔리는 음울한 음악을 함께 뒤섞으면서 노동현장의 신산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관객은 봉제사의 두 손 사이에서 폭력적으로 움직이는 바늘의 움직임이 암전된 화면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본 뒤 색다른 반전을 보게 된다. 영상을 비춘 스크린이 노래 가사 글자를 새긴 천이라는 것을. 그 노랫말이 바로 90년대 노동요로 유행했던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명작 ‘사계’의 가사라는 것을. 그 사실을 느낄 때쯤 피안에서처럼 ‘사계’의 노랫가락이 아스라한 소리로 흘러나온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하얀 나비꽃, 나비담장 위에 날아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영상설치작품 <사계>의 일부. 완충스프링으로 둘러싸인 공업용미싱 바늘이 천을 뚫고 매단 실로 글자를 박아넣는 순간을 잡은 장면이다.

장 작가의 이 영상 설치물은 지난 4월부터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차려진 기획전 ‘씨실과 날실로’의 한쪽 구석 전시방에 있다. 어두운 방 공간에는 영상이 비치는 자막 주위에 온통 천장에서 내려온 실들이 차 있다. 그 사이를 무대 조명이 번갈아 빛을 비추면서 오직 자막에 비치는 미싱노동의 신산한 현장을 주목하도록 구도가 짜여졌다. 관객들은 보고나서 대개는 앞으로 다가와 천 자막을 훑어보고 주변의 실 설치물을 지나다니다가 나간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는 말이다. 작가는 신작 같은 구작에 가깝다며 말했다.

“2016년 밴드 멤버이자 시인인 성기완 선생이 <한겨레신문>에 <사계>의 노랫말 풀이를 해놓은 기사를 읽고 이 명곡을 영상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창신동, 동대문일대에서 수십년 봉제일을 하신 어머니들을 섭외해서 한분을 스튜디오에 모시고 미싱으로 <사계> 가사를 자수로 새기는 작업을 찍은 겁니다. 공업용 기기의 난폭한 상하 움직임이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과 맞닥뜨리는 순간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내려 했어요. 그 기계의 사운드와 움직임들을요. 노래 자체의 멜로디는 최대한 배제했는데, 완성하고 나니 노동의 신산함, 고통 같은 감정들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더군요.”

이미 2016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의 대중음악 기획전에 출품했지만, 영상과 일부 사운드만 급하게 준비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이번에 사운드는 물론 실과 자수자막 등의 설치작업이 만족스럽게 이뤄져 사실상 업그레이드된 신작을 만들게 됐다고 작가는 기뻐했다. “21세기에도 미싱 잡고 고되게 일하는 노동은 계속됩니다. 그 현장의 고통과 의미를 좀더 많은 사람들이 잊혀져가는 노래 <사계>와 함께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미싱장인의 작업을 훑으며 그의 노동인생을 아름다운 경구로 은유한 전소정 작가의 영상물 <어느 미싱사의 일일>도 이번 전시의 수작으로 눈여겨 볼만하다. 6월3일까지. (02)2124-88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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