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07 05:00
수정 : 2018.08.0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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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의 1958년작 ‘송정리(평안북도 피현군)’. 종이에 에칭기법으로 작업한 동판화로 한국전쟁 시기 평북으로 피난온 평양미술대학 임시 교사의 풍경을 세밀한 묘사로 담아냈다. 거센 바람을 꿋꿋하게 견디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된 노송 아래 임시 교사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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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⑨ 변월룡의 ‘송정리’
전후 북한미술 열악한 현장 담긴
정교한 렘브란트풍 에칭 동판화
화가는 ‘소련파 숙청'에 타향살이
남북 정치상황 탓 회고전 10년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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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의 1958년작 ‘송정리(평안북도 피현군)’. 종이에 에칭기법으로 작업한 동판화로 한국전쟁 시기 평북으로 피난온 평양미술대학 임시 교사의 풍경을 세밀한 묘사로 담아냈다. 거센 바람을 꿋꿋하게 견디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된 노송 아래 임시 교사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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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위에 한가득 내리 그은 비스듬한 사선들은 몰아치는 바람처럼 다가온다. 둥치 굵은 소나무 고목은 강풍 앞에 몸체가 한쪽으로 휘어졌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 오래된 소나무가 품에 안은 기왓집 건물로 아이와 아낙이 걸어내려가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출신의 고려인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1916~90)이 1958년 그린 동판화 <송정리>는 예사롭지 않은 곡절과 사연을 지닌 수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최고미술교육기관이던 평양미술대학이 평북 피현군(용천군)으로 피난했을 당시 북한에 와있던 그가 학교 건물과 주위 풍광을 묘사한 작품이다. 남한에서는 보기 어려운 전후 북한 미술의 열악한 현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에칭 동판화 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회화적 감동까지 물씬하게 다가온다. 이런 내력은 남한에 있는 여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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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54년 전쟁 직후 평양미술대학에서 활동할 당시의 변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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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의 가난한 고려인 이주민 집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최고의 레핀미술대학에서 고려인으로는 처음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변월룡은 뛰어난 사실주의 화가이자, 17세기 거장 렘브란트의 에칭 동판화에 심취해 거장의 기법을 철저히 연구했던 동판화의 달인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당국의 신뢰 속에 화단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는 전후 북한의 미술교육과 제도를 복구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명령을 받고 평양미술대학의 고문으로 1953년 6월부터 1954년 9월까지 재직하면서 북한의 주요 화가들과 밀접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 그림은 구름과 산하의 숲, 강풍의 윤곽선을 만들어내는 정교하고 재빠른 선의 필치가 매우 강한 활력을 느끼게 하면서도 빛의 따뜻한 질감이나 주변의 황량한 풍경 등에서 당시 북한 미술계의 열악한 상황과 미술 재건을 위한 나름의 의지 같은 것들을 함께 느끼게 한다. 안타깝게도 북한 재직중 생긴 이질을 치유하러 당시 러시아로 돌아간 사이 북한 정권의 소련파 숙청이 벌어지면서 그는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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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 평양미술대학 교수진이 평북 임시교사에서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 줄 왼쪽 세 번째가 변월룡이며, 그의 오른쪽 옆 두 사람이 김주경과 문학수다. 맨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배운성이며, 맨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인물이 김용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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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의 작품이 대중에 선보인 것은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다. 애초 1994년 국내 기획자 문영대씨가 국립러시아미술관에서 그를 발견한 이래 2006년부터 국립미술관 전시를 타진해왔다. 2006년 당시엔 김윤수 관장의 의지로 전시를 추진했으나, 북한의 거부반응을 이유로 무산됐고, 2012년 이래로 미술관 내부 학예실에서 전시가 발의됐으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계속 지연됐다. 그러다 관장이 공석이었던 2015년 상반기에야 학예실의 집요한 노력이 받아들여져 2016년 변월룡의 회고전이 열리게 됐다. <송정리>도 이 전시 때 소개되면서 국내 여느 작가도 하지 못한 정교한 렘브란트풍 에칭 동판화로 호평을 얻었다. 당시 전시를 맞아 미술관 쪽은 유족을 설득해 고인의 유화소품 등 10점은 기증받고 판화 등 7점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대의 비싸지 않은 값에 인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가 기관에서 고인의 위상과 명예를 재발견하면 좋겠다는 유족의 간절한 염원이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구입품 중 일부인 <송정리>는 이런 내력과 더불어 전후 북한미술 초창기의 풍상을 묵묵히 전해주는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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