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12 18:10
수정 : 2019.02.12 19:42
[짬] 나라풍물굿조직위원회 김원호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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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진(왼쪽) 만북울림위원회 대표와 김원호(오른쪽) 나라풍물굿조직위원장. 둘은 40년 지기다. 황 대표가 김 위원장을 두고 ‘천하의 명 상쇠’라고 하자 김 위원장은 “그런 말 하지 마라”며 손사래를 쳤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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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날이 즐겁습니다.” 나라풍물굿조직위원회 김원호 위원장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린 지난 촛불 때는 광장의 시민들이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뻤다”고 한다. 그는 촛불 열기가 뜨거웠던 2016년 12월3일 동료 풍물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로 가는 길’이라는 시국선언문을 냈다. 촛불 이후 새 사회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문화의 힘으로 데워내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글이었다. 격식을 갖춰 정화수 의례굿도 치렀다. 그 무렵 전국풍물인연석회의도 만들어 나라 곳곳의 풍물인을 하나로 모으는 길을 열었다.
“3·1운동 100돌인 새달 1일 서울 세종대로에 전국 풍물인 4천여명이 모입니다. 광주 10대, 부산 8대 등 전국에서 전세버스 70대로 올라와요. 애초 3천명이 목표였는데 1천명이 늘었어요.” 지난 8일 서울 안국역 조직위 사무실에서 김 위원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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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1운동 99년을 맞아 열린 ‘천북울림’ 행사. 김원호 위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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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풍물굿조직위는 만북울림위원회(대표 황선진)와 함께 오는 1일 서울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에서 ‘3·1 100주년맞이 만북울림’ 행사를 한다. 이날 하루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가 진행하는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의 3부 문화 행사 중 하나다. ‘1만명의 시민 북수와 수천명의 풍물패가 내는 큰 울림으로 새로운 100년을 축원한다’는 취지다.
“북을 칠 시민 북수도 7천명 이상 확보했어요. 고려인 동포 600명과 새마을운동 지도자 1천명이 참가합니다. 천도교 쪽에서도 오죠. 북이 아니어도 됩니다. 소리 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 와 두드릴 겁니다.” 함께 자리한 황선진 대표의 말이다. 서양 악기인 콘트라베이스 전문 연주자 100명과 태평소 연주자 120명, 촛불 때 이름을 날린 시민나팔부대 100명, 전통무예인들도 나온단다. 탑골공원과 태화관, 독립문, 남대문, 유관순기념관에서 행진한 시민들이 세종대로에서 합류해 오후 2시부터 1시간가량 축원무와 쑥향의례, 축원비나리, 만북울림 등의 순서로 대동 한마당을 펼친다. 채희완 민족미학연구소장이 예술감독을 맡은 ‘한겨레 큰줄당기기’ 행사로 이어진다.
김 위원장에게 먼저 왜 ‘만북울림’인지 물었다. “북은 상고시대부터 함께한 우리 민족의 시원 악기입니다. 부여의 제천의식 ‘영고’는 ‘천신을 맞이해 북을 두드린다’는 의미죠. ‘만’은 숫자가 아니라 ‘모두’란 뜻입니다. 북을 울려 우리 사회의 모든 이질적인 것을 다 포용하겠다는 거죠.”
풍물은 꽹과리·장구·북·징(이상 사물)과 나발, 소고 등을 연주하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민속놀이다. 풍물놀이나 풍물굿이라고도 한다. 풍물과 어떻게 만났을까? “홍익대 3학년 때인 1978년 탈춤반에 참여하면서죠. 1980년엔 전북 임실 필봉마을에 1년간 머물며 풍물 전수를 받았어요.” 왜 풍물이냐고 묻자 “유신 시절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라고 답했다. 20년 전 펴낸 <풍물굿 연구>를 포함해 6권의 풍물 연구서도 썼다. 풍물미학자로도 불리는 이유다.
그는 80년대 문화운동의 초기 거점이었던 애오개 소극장에서 풍물 분과를 이끌었다. 서울대 탈춤반 출신인 황 대표는 이 소극장의 초대 극장장이었다. “1983년 애오개 소극장에서 전국의 수많은 풍물가락을 단순화해 ‘삼천만의 팔도가락’을 만들어 전국 172개 대학 탈춤반 간부들을 모아 가르쳤죠. 그 뒤 풍물이 대학가 탈춤반에 보급됐죠.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풍물패가 치고 나간 배경입니다. 작은 풍물 가락 하나가 동시대 삶의 기본 태도나 양식을 바꿨어요.”
‘3·1 100주년맞이 만북울림’ 준비 착착
전국 풍물인 4천명·시민 7천명 등
“뭐든 ‘소리 나는 것’ 두드리면 좋아”
탈춤반·문화운동 거친 ‘풍물미학자’
촛불광장서 풍물굿 재생 희망 발견
“앞으로 100년 ‘문화독립선언’ 기회로”
재생의 기운을 타던 풍물은 90년대 들어 다시 움츠러들었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로 풍물이 존재 기반인 현장과 대중에게서 멀어진 게 큰 이유란다. “풍물은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신산고초, 우여곡절의 표현이죠. 늘 사회적 약자 편에 섭니다. 농악은 제도권 공연 양식이죠. 사물놀이는 음악성에 치중하고요. 90년대 이후 풍물은 대중과 유리되면서 예술에 치중했어요. 공연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형식미에만 매달렸죠.”
90년대 이후 “많이 외로웠던 풍물패들”에게 지난 촛불은 희망의 전령사였단다. “풍물굿 재생 운동의 가능성을 봤어요. 촛불혁명이 아니라 촛불문화입니다. 정권 퇴진에 머물지 않고 광범위한 문화운동으로 나아가야죠. 촛불 때 따스한 공생의 정신과 재기 있는 창발적인 아이디어들이 흘러넘쳤잖아요.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봤어요. 정의와 울분 그리고 싸움으로 대변되는 70~80년대와도 다른 모습이었죠.”
그는 만북울림에 참여하는 풍물인의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그간 지역에서 제대로 풍물을 못 쳤어요. 기껏해야 농악 경연대회나 나갔거든요. 근대 농악은 농촌이 해체되면서 다 도시로 나왔어요. 풍물인들은 만북울림처럼 절차를 다한 큰 굿에 참여해 대동신명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많이 기뻐합니다.” 3·1운동 99돌이었던 지난해엔 천북울림 행사를 했다. 그때도 황 대표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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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호 위원장이 러시아 땅인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풍물굿을 하고 있다. 김원호 위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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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호(앞에서 둘째) 나라풍물굿조직위원장은 지난 9일 김용균 노동자 장례식 노제에도 징을 울리며 풍물패를 이끌었다. 김원호 위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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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3·1운동이 지난 100년의 정신사적 밑천이었다면 촛불문화가 앞으로 100년의 밑천이어야 한다’고 했다. “3·1 독립선언서 문장을 보세요. 아름다워요. 관용적이고 공생·평화적이죠. 이 문장을 읽고 소년·소녀들이 시위에 참여했어요. 그 힘으로 지난 100년 우리 역사가 만들어졌죠. 촛불광장에서 우리는 다시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했어요. 이걸 앞으로 100년의 밑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문화독립선언을 해야죠.” 계획은? “만북울림을 풍물굿의 한 유형으로 발전시켜야죠. 이번이 풍물굿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풍물굿의 원래 정신이란? “상고시대 제천의식과 문화까지 공유하는 아름다운 노동인 두레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끈 시대정신, 이 셋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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