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부산대 채희완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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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마당극 운동의 대부’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가 광화문 광장에 섰다. “젊었을 땐 마당극에서 여대생 역할도 하셨죠”라고 말을 건네자 “그땐 몸매가 됐거든”이라며 웃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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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인 내달 1일 서울 세종대로에선 시민 6천여명이 참여하는 ‘한겨레 큰줄당기기’ 마당이 열린다. 민족통일과 생명평화 두 팀으로 3천명씩 나눠 승부를 겨루고 대화합을 이루는 예술대동제다. 그 원형은 매년 3월1일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열리는 영산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26호)다. 큰줄 하나 길이가 70m에 이르고 지름은 최대 50㎝나 된다. 이날 당길 줄은 26~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만든다. 줄당기기 뒤엔 지난 100년을 분단 앞·뒤로 나눠 조망하는 역사상황극 ‘생명평화제전 12마당’이 펼쳐진다.
‘3·1백주년 기념 민족예술 큰잔치’라 명명된 이 잔치의 예술감독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를 13일 서울 광화문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70~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타올랐던 민중극 운동의 중심인물이다. 탈춤과 마당극 운동의 대부로도 불린다.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간 1970년 민속가면극연구회란 이름의 탈춤반을 만들어 다른 대학들로 확산시켰다. 전통연희를 계승한 최초의 마당극 <진오귀굿>(1973년, 김지하 대본)도 그(안무)와 임진택(연출) 작품이다. 1974년엔 국립극장 무대에 최초의 극장 마당극 <소리굿 아구>를 올렸다. 그는 여기서 안무와 여대생 역을 함께 했다. 그가 1978년 연출해 제일 교회에서 공연한 김민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민중극의 고전으로 꼽힌다. 1974년 현장성을 지향하며 만든 공연단체 ‘한두레’는 80년대까지 저항적 민중 문화운동의 본거지 노릇을 해왔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 단체명이 ‘민족평화 신명천지 축전 준비위’이다. “3·1절은 민족적 명절이죠. 명절은 그동안 살아온 걸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내다보는 뜻이 있죠. 역사를 잇는 과정이죠. 3.1운동 100년이란 민족사적 사건을 맞아 이 운동이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 어떤 형태로 작동했는지 점검하고 그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려고 해요. 역사맞이굿이죠. 지난 100년의 흐름과 앞으로 100년의 흐름을 이어주는 것이죠.” 그는 동학농민혁명 100년인 1994년에도 전북 정읍 일대에서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1박2일 동안 했단다.
왜 줄당기기냐고 하자 먼저 ‘벽사진경’이란 말을 꺼냈다. 잡귀를 물리치고 경사스럽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우리 민속행사 대부분이 판을 짜서 겨룹니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한판 붙어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를 예축(미리 축하함)하죠. 더 좋은 세상으로 전진하도록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줄당기기가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란 점도 짚었다. “줄의 재료는 짚풀입니다. 식량의 기본이죠. 우리 현실이자 삶입니다. 줄당기기는 오늘날 스러져가고 있는 농사짓는 일의 새로운 의미를 구축할 수도 있어요. 줄당기기는 적을 짓눌러 이기는 남성적 놀이가 아닙니다. 이기려면 상대를 내 쪽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뒷걸음쳐야 이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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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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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번 행사가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먼저 지름이 50㎝인 암줄의 머릿줄에 수줄을 끼우고 비녀목으로 단단히 묶어요. 암줄과 수줄의 교합이죠. 민속적 의미로 생산력 증대를 뜻하죠. 풍요 맞이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에 비해 줄당기기는 금방 끝나죠. 시민들은 큰줄의 곁줄의 곁줄, 경상도 말로 젖줄을 당깁니다. 큰 용 형상을 한 큰줄을 어깨에 메고 전진하는 모습이 이 행사의 백미죠. 줄이 전진할 때 주변에서 놀고 마시고 노래도 합니다. 대규모 시위 현장을 연상시킵니다.”
광화문 줄당기기는 두 패를 태극기 중심색인 파랑띠와 빨강띠로 나눈다고 했다. “흔히 하듯 암줄과 수줄 또는 동부와 서부로 가르지 않고 파랑띠의 생명평화줄과 빨강띠의 민족평화줄로 나눕니다. 두 의미가 부딪치며 화쟁하는 것이죠. 행사 전에 자신이 속한 패의 머리띠를 구입해 두르고 줄을 당기게 됩니다.”
채 교수는 88년부터 지리산을 비롯해 문경새재와 계룡산 등 백두대간 산맥을 찾아 민족통일대동장승굿을 해왔다. 3년 전 무등산에서 한 굿이 가장 최근으로 11번째였다. 군 위안부를 태운 관부연락선이 떠나던 부산항 부두에서 93년 시작한 정신대해원상생대동굿도 그간 15차례나 했다.
“큰줄당기기 연출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영산줄당기기에 자주 가서 구경도 하고 당기기도 했죠. 60년대만 해도 3만 명이 참여했어요. 지금은 노인이 많죠.”
서울 한복판의 큰줄당기기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하자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대학 축제에서 대동제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80년대 대학가에선 많았어요. 대학줄이나 통일줄이라고 했죠. 이게 격렬한 시위로 번지기도 했죠.”
3월1일 세종대로서 열리는
민족예술 큰잔치 예술감독 맡아
‘영산줄다리기’ 서울 한복판서
민족통일·생명평화 나눠 줄 당겨
지난 100년 살피는 역사상황극도
70~80년대 민중극 운동의 대부
그는 생명평화제전 12마당 중 7~10마당인 ‘새 시대를 향한 민족적 웃음과 울음’의 대본을 직접 썼다. 탈춤으로 엮는 시사 상황극이다. “12마당은 지난 100년을 분단 전·후로 나눠 역사를 되돌아보고 해결되어야 할 과제를 살피고 진전될 세상을 꿈꿉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을 거쳐 미국을 비롯한 또 다른 서구세력의 각축전으로 분단됐어요. 이후 남·북이 갈라지면서 각자도생하고 그 뒤 민중적 사건이 벌어지죠.” 직접 쓴 대본 이야기로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가 민족적 신명의 열기를 부활시켰죠. 그걸 먼저 재현하죠. 하지만 같은 시기에 효순·미선이가 장갑차에 깔려 죽었어요. 그 뒤로 4대강에 유람선이 뜨고 좌초당하죠. 이 물이 물대포가 되어 농민 백남기가 쓰러집니다. 또 세월호와 같이 여러 사람이 물에 잠기고 그 뒤에 물에서 작은 촛불이 밝혀지죠. 탈춤 마당극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씻어내는 굿이죠.”
자신이 꽃피운 마당극 혹은 마당굿을 “21세기 세계연극 놀이양식의 독특한 개척분야”라고 했다. “지금도 좋은 예로 (마당극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을 벗어나 인간과 사회 이야기를 하면 연극의 발전이라고 봤던 그 생각을 수정하고, 적극적 의미의 사회적 영성의 회복이나 사람은 다 사회적으로 거룩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아 판을 벌이고 싶어요. 바로 마당굿이죠. (연극에서) 감수성이나 영성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반쪽 측면만 획득하는 것이죠.” 말을 이었다. “더 넓고 더 일상적이고 더 민중적인 한국적 종교적 심성이 깔린, 예컨대 천지인 삼재 사상과 원효나 동학사상이 깔린 제의의식 같은 것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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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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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에서 퇴임하고 집을 경주로 옮겼지만 지금도 부산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전문춤꾼들에게 탈춤 전수를 하고 있단다. 1985년 부산대에 자리 잡았으니 부산·경남을 축으로 활동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부산·경남은 춤의 고장입니다. 호남은 소리의 고장이고요. 여기는 보이는 것마다 다 춤이죠. 춤의 물리적 토양이 좋아요. 개인적으론 낮에는 서생인 양 하고 밤엔 광대로 놀았어요. 이중적이라기보다는 경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좋은 의미의 딴따라로 살아왔어요.”
그가 88년 주도해 만들고 이끈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소속 연희패들이 내달 광화문 행사에 적극 참여한단다. “협회엔 30개 이상 단체가 있죠. 지역에서 대학 연극반이나 풍물반 활동을 하다 대학을 나온 뒤에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원주의 무위당 만민회나 광주의 무등공부방 등 지역 단위 문화교육단체들도 참여합니다.”
탈춤과는 만 20살이 되던 1968년 단오 무렵에 처음 만났다. 경기고를 나와 바로 들어간 대학 1학년 때였다. “창경원에서 봉산탈춤을 봤어요. 전율을 느꼈어요. 피맛이랄까, 혈맥이랄까. 뭔가 멀리 있으면서 근원적이고 내 몸을 지탱시켜 준 그 무엇이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죠. 1년 뒤 봄에 민속학자 연구모임인 한국가면극연구회를 찾아 탈춤을 배웠어요. 대학을 그만두고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죠. 연구회엔 이두현 임석재 선생 등이 계셨죠. 배움을 청했지만 저는 찬밥 신세였어요. 얼마 못 배웠어요. 70년 서울대에 들어가자마자 탈춤반 모집에 나섰죠.” 경기고 시절엔 브라스밴드에 가입해 클라리넷을 연주했단다.
미학과는 왜? “미학과는 늘 가려고 했어요. 어떤 학문인지도 잘 모른 채 그 용어 때문에 가고 싶었죠. 미학과에 들어가고 난 뒤에 미학은 아름다움만 연구 대상인 게 아니라 미와 대립하는 추도 연구대상이란 걸 알고 근사한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죠. 탈춤도 통상적 의미에서 미는 아니죠. 미적 추이죠. 그냥 못생긴 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추입니다.”
고교도 1년 늦게 졸업해 합치면 친구들보다 서울대 입학이 3년 늦었으나 1학년 때 탈춤반을 만들고 지도자 노릇까지 했다. 채 교주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런 카리스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탈춤 공부는 어떻게? “그때만 해도 보유자들이 많았어요. 10명 이상인 종목도 있었고 보통은 종목당 5~6명 계셨어요. 황해도 탈춤은 딴 지역보다 더 활발해 월남하신 분들이 이미 복원을 해놓았어요. 현장자료를 많이 구하고 공연도 같이했죠. 보유자분들의 직접 교습 기회도 열려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이분들은 동네에서 인정을 못 받았어요. 대학생들이 찾아가면 많이 반기셨죠.”
“마당극은 21세기 세계 연극
놀이양식의 독특한 개척 분야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 있어”
“지금도 부산에서 주 1회 탈춤 전수
낮 서생, 밤 광대로 살았다
김지하 사단 다시 모여 한 판 짜봤으면”
74년 미학과 대학원을 간 것도 탈춤 전도사로서의 책무감이 컸단다. “임시로 적을 둔다는 생각이었죠. 그땐 탈춤밖에 몰랐어요. 여러 대학을 돌면서 탈춤 동아리를 새로 만들기 위해 계속 뛰었어요.”
‘5공화국의 괴벨스’로 불리는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5공 초기 ‘국풍 81’이란 대규모 문화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의 대학 풍물패 간부들을 만나 적극 참여를 권유했다고 한다. “저는 처음부터 반대했으니 행사 전에 만나자는 말은 없었죠. 끝난 뒤에 만났어요. 김지하 시인과 하는 모임에 그가 와서 혼나고 가기도 했어요. 허문도 혼자 내가 하는 공연을 몰래 구경하고 가는 걸 여러 차례 목격하기도 했어요.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 시절에 일본판 국풍을 목격하고 5공 정권에서도 문화적 전변의 힘을 활용하려고 했죠. 70년대도 (박정희 정권은) 한국적 문화를 추구했어요. 한 편으로는 전통문화를 장려하면서도 진보적 생각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민주저항문화는 혹독하게 박멸하려 했죠. 두 가지가 다 있었어요.”
대학원에서 조교를 할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기관원이) 나를 자주 불러 ‘넌 도대체 뭐냐, 추구하는 게 민주화냐 뭐냐 애매 몽롱하다’고 추궁했어요. 그때마다 저는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합니다’고 답하곤 했죠.”
마당극의 존재감이 희미해진 지 오래다. 채 교수는 어느 자리에서 “우리 사회 ‘공공의 적’이 사라진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학문화가 없다는 거죠. 사회적 여건이나 국면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대학 생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너무 무자각적입니다. 대학문화의 꽃이 대학 축전인데 지금 보면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20~25살 사이에 마땅히 누려야 할 그 문화를 포기하고 구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걸 돌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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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교수가 1970년 서울대에 만든 탈춤반이 대학 1호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과 다르단다. “1969년 부산대 철학과 이상열 학생 중심으로 부산대에 전통예술연구회란 이름의 탈춤반이 생겼어요. 부산대가 1호죠.” 김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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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1일에 몸으로 줄을 당기면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명절처럼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강력한 계기가 필요해요. 줄당기기는 원초적 양식입니다. 몸으로 줄을 당기며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말을 이었다. “한국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을 지낸 고 조성국 선생께선 ‘농사짓는 일을 예술로 인정하는 단체야말로 가장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단체’라고 하셨어요. 줄당기기엔 그런 정신이 있어요. 지금 농업이 바스러진 채 밀려나 있잖아요. 누가 뭐라도 삶의 근본 토대인데요.”
그가 78년 연출한 <공장의 불빛>은 지금 진본 공연 영상을 구할 수 없다. 그가 쓴 대본만 있단다. 동영상 사이트에 화질이 매우 떨어진 영상이 있지만 실제 공연은 아니다. 그의 마당극 대부분이 그렇다. “<공장의 불빛>은 김민기류 오페라이죠. 당시 경찰에 포위된 상태서 공연했어요. 공연 뒤 제일 교회를 빠져나가기 바빴어요. 유튜브 영상은 이화여대 시청각실에서 잠깐 연습하면서 찍은 겁니다. 그 시절 민중극을 같이 한 사람들 가운데 무대 위는 ‘연우무대’, 아래는 ‘한두레’로 역할 분담을 했어요. 내가 속한 한두레 공연은 찍은 게 없어요.” 올해 창립 45년인 한두레는 지금도 ‘놀이패 한두레’란 이름으로 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활동은 예전만큼 못하단다.
“과거 김지하 사단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한번 다시 모여 한판을 짜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는 올해로 2년째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나이가 많다고 시켜준 거죠. 하하.”
가장 사랑하는 한국 춤을 꼽아달라고 하자 먼저 원효 스님이 추었다는 무애무를 들었다. “원효가 여러 떨거지와 어울려 함께 춘 춤이죠. 원효는 이 춤으로 진속일여의 경지에 들었고 바닥의 것이 거룩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했어요.” 1970년대 초 동래사람 김희영의 학춤과 1980년대 밀양사람 하보경의 뻘춤(범부춤)과 양반춤 그리고 밀양 병세이굿(병신굿)에 나오는 기타업 장단의 히줄래기춤, 떨떨이춤과 조선 전통춤의 태두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의 승무도 좋아한단다. 마지막으론 호남 사람이면서 부산에서도 산 이매방의 삼현승무를 꼽았다. 삼현승무의 매력을 “남도그늘 속 쩔어나오는 폭발적인 신기의 혼돈과 유연한 절단”이란 말로 표현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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