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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5 18:36 수정 : 2019.09.23 11:17

올해 데뷔 40돌을 맞은 가수 이치현을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979년 데뷔, 올해 40돌 맞아
여친 선물로 썼던 시 ‘당신만이’
‘슈스케6’에서 다시 불려 인기몰이

올해 데뷔 40돌을 맞은 가수 이치현을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눈부신 햇살이 비춰주어도/ 제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토록 아름다운 당신만이/ 나에게 빛이 되는걸~”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린 축제 종로콜링에서 ‘당신만이’가 울려퍼졌다. 벗님들이 1980년 처음 선보인 노래를 밴드 리더 이치현이 부른 것이다. 축제를 찾은 20~30대 관객들은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젊은 친구들 앞에서 하는 공연이라 당황스럽고 겁도 많이 났어요. 공연 직전까지 ‘과연 내 음악에 공감해줄까?’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고 뜨거운 반응을 해줘서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난 이치현이 말했다. 올해로 데뷔 40돌을 맞은 그는 여전히 1980년대 전성기의 외양과 부드러운 미성을 간직하고 있다.

‘당신만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지금의 아내인 당시 여자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바친 시를 노랫말로 붙인 것이다. 이 노래가 20~30대의 ‘떼창’을 부를 만큼 사랑받게 되기까지는 구불구불한 세월만큼이나 우여곡절이 있었다.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형들의 영향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기타를 쳤다.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익힌 플루트로 중앙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가세가 기울자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에서 기타를 쳐야 했다. 나중엔 친구와 듀엣으로 레스토랑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에 벗님들이란 이름의 듀엣으로 나갔다가 덜컥 인기상을 받았다.

돈을 벌려고 한 음악이 그를 정식 가수의 길로 이끌었다. 기획사와 계약하고 1979년 3인조 밴드 벗님들로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소속사 가수 이은하에게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정식 데뷔를 했는데도 지방에 다니며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야 했다.

대전에 머물며 밤무대 활동을 할 때였다. 서울에 살던 여자친구가 생일을 맞아 대전으로 왔는데, 선물로 줄 게 없었다. 함께 대전 동학사를 걷다가 나무판에 인두로 글과 그림을 새겨주는 인두화 장수를 만났다. 여자친구와 산책하며 시를 한편 짓고는 이를 인두화로 새겨 선물했다. 이 시를 바탕으로 만든 노래가 ‘당신만이’다. 이를 타이틀곡으로 한 2집(1980)은 자신 있었다. 잘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이번에도 홍보 부족으로 묻혀버렸다. 그길로 기획사를 박차고 나왔다.

올해 데뷔 40돌을 맞은 가수 이치현을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재수록해 리메이크 해도 안되더니…

젊은 관객들 당황스럽고 겁도 나

두달꼴 신곡내고 유튜브 방송도 계획”

1984년 새 기획사와 계약하고 5인조로 재편한 벗님들로 3집을 발표할 때 ‘당신만이’를 다시 실었다. 하지만 이 앨범도 망했다. 이듬해 발표한 4집은 이치현이 자비를 들여 녹음한 것이었다. ‘다 가기 전에’ ‘추억의 밤’ 등이 반응을 얻을 즈음 벗님들은 방송 출연 대신 대학로 소극장으로 들어갔다. 팬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며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이는 5집의 ‘사랑의 슬픔’(1986), 6집의 ‘집시여인’(1988)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당신만이’는 훗날 김건모, 김연우, 이정 등 노래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절창가수들이 다시 불렀지만 널리 알려지진 못했다. 이 노래를 폭발시킨 기폭제는 2014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케이 6>에서 곽진언·김필·임도혁이 선보인 무대였다. 이는 음원차트 1위까지 오르며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북미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였는데, ‘벗님들’과 ‘당신만이’가 포털 검색어 1·2위에 올라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쉬운 마음에 제 앨범에 계속 재수록하고 다른 가수들이 그렇게 리메이크를 해도 안되더니만, 결국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했죠. 삶이란 게 그래요.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1991년 솔로 데뷔 이후에도 그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가요계 판도가 바뀌자 90년대 중반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 ‘산타나’를 열고 7080 바람을 일으켰다. 산타나는 그가 멘토로 여기는 기타리스트다. 히트는 못했어도 2016년 14집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표해왔고, 요즘도 전국 곳곳을 다니며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주말 삼천포에서 공연했는데 수천명이 모였어요. 7080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지만 우리들이 설 만한 방송은 자꾸 사라져요. 그래서 이젠 체계적인 회사를 만들고 제대로 해보려 해요. 두달에 한번씩 신곡과 리메이크곡을 디지털 싱글로 내고 유튜브 방송도 만들어보려고요. 데뷔 40돌에 큰 의미를 두진 않지만 우선 가을에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하고요, 제대로 된 공연은 내년에 하려고 계획중입니다.”

지난 7월 그의 무대를 보고는 나이를 검색해봤다. 1955년생, 한국 나이로 65살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비결을 물었다. “먼저 풍성한 머리숱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요, 저만의 비결은 ‘긴장’입니다. 나이 들수록 무대가 더 떨리고 관객이 무서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외모, 옷차림, 목 관리를 더 철저히 해요.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남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성에 안 차거든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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