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4 18:28
수정 : 2019.12.05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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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작가의 신작 ‘고군산군도’ 연작 중 하나. 섬의 바위 암면을 세세하게 포착한 12개의 사진을 콜라주하듯 한데 붙여 내걸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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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작가 ‘자연과 인체’전
구본창 작가 ‘인코그니토’전 등
이갑철 작가 ‘적막강산 도시징후’전
3인3색 스타 작가 사진전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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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작가의 신작 ‘고군산군도’ 연작 중 하나. 섬의 바위 암면을 세세하게 포착한 12개의 사진을 콜라주하듯 한데 붙여 내걸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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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바위섬의 자글자글한 암벽 표면이 눈앞에 다가오는 현장감. 펄펄 튀는 미꾸라지가 수면에 첨벙거리며 빚어낸 추상화의 현란한 이미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는 듯한 도시의 밤거리.
국내 스타 사진가 3인방이 팔팔한 이미지들을 내장한 신작들을 들고 연말 전시판에 나타났다. 지난 20여년간 국내 사진계 지형을 이끌어온 실력파들인 민병헌(64), 구본창(66), 이갑철(60) 작가다. 세 작가는 모두 틀에 박힌 다큐 사진이나 살롱풍 예술 사진의 도식을 단연코 거부해왔다. 1980~90년대 이래 국내 사진계에 현대 모더니즘 사진의 조류에 맞는 개성적인 자기 세계를 정착시킨 이들이다. 지난 10월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안일한 회고전 일색의 형식을 피하고 수년간 물밑에서 작업해온 신작이나 근작들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암벽(민병헌), 소외된 동물과 사물(구본창), 도시의 명암(이갑철) 등 소재들을 새롭게 자기 작업 속에 끌고 들어왔다는 점이 도드라진다. 등록상표처럼 각인된 기존 세 작가의 취향이나 특징을 벗어나려 하거나 새롭게 변주하면서 더욱 폭넓고 웅숭깊은 시선을 보여준다는 호평이 나온다.
첫머리에 놓일 수 있는 전시가 민병헌 작가의 대구 신작전이다. 5년 전 전북 군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이래 인근 고군산열도 섬들의 자연과 생태를 탐방하면서 정중동의 작업을 진행해온 민 작가다. 뜻밖에도 대구 루모스 갤러리에서 지역 첫 개인전인 ‘자연과 인체’(22일까지)를 열어 지난 수년간의 섬 작업들을 망라해 과거 누드 작업과 함께 선보이는 중이다. 그동안 <안개> <설원>(스노랜드) 등 대표연작들을 통해 수묵화처럼 부옇고 아련하고 모호한 화폭의 작품들을 주로 내놓았던 민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태양빛 아래 자연 경물의 구상성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며 만든 회심의 역작인 ‘고군산군도’ 연작을 전면에 내걸었다. 특히 바위의 암질과 풍화의 결이 속속들이 보이는 조각 사진 12개를 콜라주해 롤사진처럼 만들어낸 들머리의 대작은 전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2~3년 전부터 <물가> <이끼> 연작을 통해 맑은 날 밝은 톤으로 명확하게 찍는 작업으로 초점을 옮겨간 작가 나름의 변화와 파격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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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 작가가 올해 경기도 성남의 시장에서 촬영한 신작. 미꾸라지들이 수조의 수면 아래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위에서 찍었다.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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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의 사진예술전용관으로 꼽히는 한미사진미술관과 서울 강남의 사진공간 스페이스22는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대가인 구본창 작가의 재조명에 뛰어들었다.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 본관 19·20층에서는 사물성의 새로운 탐구와 확장에 초점을 맞춘 구본창의 신작·근작 개인전 ‘인코그니토’(익명의)와 1985~90년 서울 길거리 기행의 산물인 ‘긴 오후의 미행’ 연작 회고전(두 전시 모두 내년 1월11일까지)이 차려졌다. 구 작가는 80년대에 귀국한 뒤 리얼리즘 다큐 사진과 사진관 살롱의 예술 사진으로 양분됐던 국내 사진판에 이른바 피사체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물성의 표현에 주력하는 서구 작가주의 사진의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본관 전시는 지난 30여년간 전통풍속 유산이나 백자, 비누 같은 특정 사물들을 눈으로 더듬어 작업하면서 농익고 깊어진 사물 이미지 수집의 최근 경지를 보여준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도시 공간들을 보면서 버려지거나 잊힌 풍경, 일상 사물들을 찍은 사진들이 내걸렸다. 올해 경기 성남의 시장에서 촬영한 신작이 압권이다. 미꾸라지들이 수조의 수면 아래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위에서 찍은 작업은 극사실적 분위기의 추상회화와 다를 바 없다. 여러 겹 다색 장판들이 마치 구성주의 회화처럼 아름답게 아롱진 사진들이나 헐어낸 건물의 시멘트 덩이만 남은 실루엣 골조 사진에서 보이듯, 사물의 물성에 천착하는 그의 시선은 더욱 집요하고 깊은 경지로 치닫는 듯하다. 80년대 서울 도심 꽃가게 간판에서 ‘꽃’ 글자의 붉은 페인트칠이 피처럼 흘러내리는 광경을 선연하게 찍은 20층 회고전과 대비해 보면서 그의 작가의식이 변주된 과정을 새삼 곱씹게 된다. 스페이스22의 또 다른 회고전 ‘비욘드 더 실버’(26일까지)에서는 이른바 만드는 사진이라고 불렀던 구 작가의 전위적인 작업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인화지 묶음을 불에 달궈 설치작품처럼 만들거나 거칠게 인화된 사진조각들을 실로 기워 붙여 평면작품화한 그의 초기작들을 처음 망라한 자리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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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철 작가의 ‘도시징후’ 연작 중 하나. 특유의 흔들거리는 즉물적 시선으로 도시의 세 요소인 인간 군상, 빌딩, 빛을 조명했다.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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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사진미술관의 서울 북촌 삼청동 분관은 지난달 8일 문을 열면서 사진가 이갑철의 개인전 ‘적막강산 도시징후’(내년 1월15일까지)로 개관전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 사진가는 그의 출세작 전시인 2002년 ‘충돌과 반동’전에서 보여준 한국인 특유의 기운생동한 심상 풍경 작업들을 서울을 비롯한 도시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도시의 어두운 여백을 또 다른 생동의 에너지가 잠재된 공간인 ‘여흑’으로 규정하고, 도시인의 군상과 건물 풍경 이면에 숨은 기의 세계를 탐구하는 출품작들은 만든 과정이 특출하다. 수년 전 기가 와닿으면 그냥 찍은 뒤 묻어두어 세월과 함께 숙성시킨 것을 최근 꺼내어 인화한 사진들인 까닭이다. 심야에 현란한 빛선 속에 흐늘거리는 도시인의 군상과 도로 주변을 점유한 기묘한 어둠의 자취, 과다노출로 구멍 뚫린 듯 펀치 흔적이 남은 거리 이미지 등이 2·3층에 출몰한다. 하이힐 신고 해변을 걷는 여성과 멀리 걸어가는 남성의 모습이 물가에 비치는 빛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대비를 이룬 3층의 근작은 ‘지랄 맞다’ ‘기가 넘실거린다’ 등으로 요약되는 작가의 또 다른 득의작이라 할 만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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