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⑦ 뼈가 말하는 고대사 (상)
고대 순장자는 노예라는 기존 생각
법의학적 연구 결과 쌓이면서 깨져
고령 지산동 순장자 인골 분석하니
뼈에서 육류 즐긴 흔적 나오고
금동관 쓴 채 묻힌 순장자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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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신라 시대에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순장자는 모두 노예일 거라고 추정했으나, 인골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순장자의 신분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육류를 즐긴 순장자도 있으며, 일부 순장자는 금동관을 쓴 사람도 있다. 사진은 순장이 행해진 가야 고분의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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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쉬는 도중 한신대학교 박물관의 이기성 박사(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발굴조사 중인 현장으로 속히 와 달라는 당부였다. 달려가 보니 조사원 몇몇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조사하는 중에 투명한 비닐로 감싼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고인돌이나 조선시대 무덤에서 인골을 수습한 경험이 몇차례 있기는 하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연구실의 이숭덕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이 교수는 젊은 연구원 한 명과 함께 금방 현장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비닐 속에서 꺼낸 시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교수는 여름철에 자연사한 행려병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시신이 더 나올 것 같다고 말하고 떠났다. 과연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비닐에 싸인 시신이 속속 발견돼 이 교수의 예언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유적이 입지한 그곳은 최근 무연고 상태로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집단 매장지였던 것이다. 그 후에도 발굴 현장에서 유골이 발견되면 이 교수의 도움을 받고는 하였다. 이 지면을 빌려 고고학 연구자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법의학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인골에 남은 전쟁의 흔적
과학수사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법의학자들의 활약은 역사 연구에서도 반복된다. 6·25전쟁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학살당한 분들의 시신을 찾고, 사인과 신원을 밝혀내는 작업은 법의학자와 체질(형질)인류학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들의 연구를 통하여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일부나마 복원되고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의 활약은 선사와 고대, 중세의 유적 발굴 현장에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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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에서 발견된 기원전 2~1세기의 한나라 무덤. 지역관리인 리창과 그의 부인 신추, 아들이 각각 묻힌 이 무덤은 시신 등 부장품이 완벽한 상태로 발굴됐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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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에서 발굴된 신추의 생전 모습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다. 복원 모형 왼쪽은 발굴 당시의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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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의 피부가 여전히 탄력적일 정도로 보존이 완벽했던 신추의 무덤 모형. 16m 깊이에 여러 겹의 목관과 목곽을 둘렀으며, 그 사이에는 목탄과 점토가 채워져 있었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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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馬王堆)란 곳에서는 기원전 2~1세기 무렵 이 지역 고위 관리였던 리창(利倉)과 부인인 신추(辛追), 그들의 아들이 각각 별도의 무덤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신추의 무덤은 깊이가 16m나 될 정도로 깊고, 시신은 여러 겹의 목관과 목곽으로 감쌌으며, 목곽 바깥에 두께 40~50㎝, 총 무게 5t이나 되는 목탄을 다져 넣고 다시 그 바깥에 하얀 점토를 채워서 습기와 해충을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그 결과 부패되지 않고 원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엄청난 양의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한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 놀라운 발견의 압권은 신추의 시신이었다. 그의 시신은 관절이 움직이고 피부에 탄력이 남아 있었으며, 모공과 지문이 확인될 정도로 생생하였다. 또 신추의 위 속에서는 미처 소화되지 않은 참외 씨가 발견됐다. 시신을 감식한 의료진은 그의 나이는 50살 전후, 신장은 158㎝, 평소 동맥경화증으로 고생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생생한 모습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아쉽게도 곧바로 화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와 중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시신은 문헌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환경, 식생활, 병리, 위생 등 여러 측면을 해명해주는 역사 자료란 점에서 고인에 대한 적절한 예의를 갖추면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전쟁의 참상을 증명하는 유골은 근현대는 물론이고 선사시대 이후 전 역사를 거쳐 많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학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유골이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성인이 모두 포함된 유골 수십 구는 이들이 전투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학살당하였음을 증명한다. 조총과 칼, 창에 의해 살해된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절명하였는지는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학교 교수에 의해 생생하게 밝혀졌다.
일본의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규슈 지방의 무덤에서는 머리가 잘리고 몸통만 옹관에 묻힌 경우, 반대로 머리만 묻힌 경우가 확인되는데 이는 적의 수급을 취하는 형태의 전투가 치러졌음을 의미한다. 화살촉이나 돌칼, 동검 등 무기의 끝부분이 몸에 박힌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때에는 곧바로 사망한 경우, 부상이 치료되고 후유증을 앓으면서 몇년을 더 생존한 경우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그려볼 수 있다. 심지어 몸에 박힌 흉기의 나머지 부분을 다른 누군가의 무덤에서 찾아내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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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요이시대 무덤에서 나온 한 머리뼈에 청동제 무기가 박혀 있다. 이런 인골 연구에는 법의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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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나오는 돌칼이나 화살촉 중 일부는 부장품이 아니라 흉기일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는 토양의 산성 성분이 강하여 무덤에서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가 드문 편이지만, 부장용으로 넣은 화살촉과는 다른 형태이거나 부러진 화살촉이 몸통 부위에서 발견될 경우 그 화살촉은 부장용이 아니라 사람을 살상하던 흉기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지배 엘리트의 무덤에 많은 무기를 부장하는 풍습도 당시 사회가 전쟁으로 인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군사지도자를 숭배하는 분위기였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금속기, 쌀농사, 방어취락이 통째로 전해지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전쟁도 함께 전해졌다고 판단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모두 작은 지역 단위의 경쟁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집단 간, 개인 간의 우열의 차이는 심해졌고 고대국가 형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살해당한 인골은 그 여정을 증명해주고 있다.
나주 복암리 옹관이 남매 근친혼 증거?
고대 사회사 연구에서도 인골은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돌이나 나무로 두개골을 압박하여 변형을 꾀하는 편두의 습속은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김해 예안리고분군의 인골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고구려 개마총 고분벽화의 주인공, 신라 금령총 출토 흙인형도 모두 편두로 추정되므로 편두는 기괴한 풍습이 아니라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 의외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사천 늑도와 김해 예안리의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에서는 일부러 생니를 뽑은 발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발치는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며 그 과정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고전소설 <배비장전>은 기생 애랑이 비장 벼슬하는 배씨 남정네를 농락하고, 그 애랑의 사랑을 얻기 위해 생니를 뽑아 주는 배비장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고대인들이 왜 발치를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생의 중요한 시점, 예컨대 성인식을 치르면서 실시하였거나, 혹은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풍습(‘할체’(割体)라고 부름)의 한 종류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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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 지역의 가야시대 송현동 고분에서 나온 순장 소녀(송현이)를 복원한 모습. 성장판이 채 닫히지 않은 16살 전후의 송현이는 정강이뼈에 무릎 꿇은 자세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에서는 금동 귀걸이를 한 상태였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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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에선 순장 소녀가 금동귀걸이
노예 가설만으론 충분한 설명 안돼
고대의 사회상 제대로 그리려면
체질인류학·법의학 등과 결합해야
하나의 무덤에서 여러 구의 유골이 출토되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는 가족묘라고 판단할 것이고, 남녀가 함께 매장되었으면 부부 관계라고 단정할 것이다. 그러나 인골에서 추출한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친족관계를 추적한 요즘 연구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막연한 추측이 그릇되었음을 밝혀냈다. 나주 복암리 1호분의 한 돌방에서는 대형 옹관 4개가 발견되었고, 그중 3호 옹관에서 2인의 인골이 합장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모계로 연결됨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관계는 외할머니와 손자, 어머니와 아들, 남매, 이모와 남자 조카, 외삼촌과 여자 조카 등으로 좁혀진다. 분석이 실시된 1999년도에는 남매의 근친혼을 추정하는 견해가 강하였으나, 합장된 남녀가 반드시 부부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복암리 근처의 영동리에서도 여러 개의 돌방과 돌덧널로 구성된 무덤에서 다수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의 분석 결과, 하나의 매장시설 안에서 발견된 인골들의 관계는 매우 다양해서 형제가 함께 묻힌 경우, 남매가 함께 묻힌 경우, 자매가 함께 묻힌 경우, 부부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 혈연적으로 무관한 여성들이 함께 묻힌 경우 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고대 사회의 혼인과 가족구성, 매장 단위 등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재고해야 함을 말해준다.
인골을 통한 고대 사회사 연구의 대표 격은 단연 순장이다. 6세기 창녕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인 송현동 15호분에서 순장된 인골 1구를 분석한 결과 성장판이 채 닫히지 않은 신장 153㎝ 정도, 16살 전후의 소녀로 규명되었다. 두개골을 컴퓨터 단층 촬영하고 여기에 16살 된 현대 한국인 여성 40명 얼굴 살의 평균 두께를 참조하여 살을 붙여 복원해보니 현대인보다 약간 짧은 턱뼈, 펑퍼짐한 얼굴의 소녀가 나타났다. 송현동이란 지명을 따서 송현이라고 불리게 된 이 소녀는 살아생전 모시던 주인의 죽음에 즈음하여 강제로 죽임을 당하였다. 송현이를 순장한 이유는 그의 주인이 저승세계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송현이의 경골(정강이뼈)과 비골(종아리뼈)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생활하였던 가엾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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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 고분인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현재까지 가장 많은 순장자(40명)의 인골이 나왔다. 사진은 지산동 44호분의 복원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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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 순장된 고령 지산동 44호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회에서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 5세기 무렵의 왕릉인 황남대총에서는 순장당한 소녀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가야의 경우는 순장에 대한 기사가 없으나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고령 지산동 등 당시의 왕릉급 고분에서 많은 사람을 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표적 순장묘인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총 40명 정도의 사람이 순장당하였는데 그들의 직책은 창고지기, 마부, 호위무사, 첩, 시녀 등으로 추정된다.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며 부부, 부녀, 형제, 자매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순장당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고, 순장의 실시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라는 견해가 한때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순장당한 사람들에 대한 고인골 연구가 진행되면서 차츰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순장당한 송현이는 금동제 귀걸이를, 고령 지산동의 한 순장자는 금동관을 쓰고 있었다. 인골에 대한 골화학적 분석 결과 순장당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육류와 곡류를 골고루 섭취하였고, 심지어 육류 섭취가 더 많았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순장당한 사람들이 모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강제 노역에 종사하던 노예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역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그중 일부는 왕족이나 귀족의 먼 친척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 매우 중요한 순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문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고인골에 대한 법의학적, 체질인류학적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학자가 체질인류학과 법의학을 겸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인접한 학문 분야의 연구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안개로 덮인 고대 사회의 면모가 서서히 밝혀진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역사학이 인문학의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시대는 지났다. 고대사 연구 역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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