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21세기 현대사
⑪이승만 ‘방미외교’의 실상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
이승만에 대한 통념 사실일까
우익단체의 ‘민족대표’ 자격으로
46년 말~47년 초 방미한 이승만
목적지 유엔엔 폐막 때까지 안 가
의제상정보다 정치계획 선전 초점
단독정부 주장하며 미군정 비판
|
이승만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1947년 4월)한 직후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앞서 하지는 미국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승만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자신의 고문인 굿펠로에게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안 만나겠다는 맥아더 귀찮게 해
겨우 몇분 본 뒤 계속 떠벌려”
이승만 밀어줬던 하지, 맹비난
여행경비, 동회에 할당 강제징수 이승만과 맥아더의 만남? 환송식을 지켜보면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승만의 한 추종자는 “사려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반응하였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민족대표’라는 화려한 외관과 미국 도피라는 인식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들이 감추어져 있을까?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신문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나른 건가, 아니면 ‘사려있는 사람들’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일까? 어떻게 당대에조차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 장군이 자신의 정치고문이었고 이승만과도 친밀했던 굿펠로 대령에게 쓴 1947년 1월28일자 편지가 이와 관련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략)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수개월간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신임을 주었고 심지어 미국에 가서 한국의 정세, 그리고 통일된 한국 독립을 이루기 위해 뭔가 결정적 행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주의깊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한국의 위대한 애국자’로 적당히 키워주어서 미국의 주목을 끌면 그것이 한국에 우호적 영향을 줄 것이고, 또 이곳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행동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가 미국에서 하려는 주된 작업이 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승인받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봉기와 혁명을 일으켜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남한 정부를 수립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특히 그에게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더는 통하지 않고 지금은 한국 독립을 위해 뭔가 전향적 조치를 해야 할 때임을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언급하거나 러시아인들과 모스크바 결정을 비난하지 않도록 자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그와 그의 부인 사이의 암호화된 교신 전보들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보여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입니다. 그의 거창한 계획은 1월18~20일 사이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았습니다. 이제 봉기일은 3월1일로 바뀌었고, 김구가 이승만의 혁명 계획을 이용해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반탁’ 구호를 내걸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인 몇명이 피를 흘리게 만들어서 미국인들 사이에 미군 철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승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한국인들을 향해 했던 거창한 약속들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더하여 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과도한 집착 때문입니다. (…) 그가 도쿄에 갔을 때 맥아더 장군은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고, 그의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노인네는 출발을 하루 늦추면서 계속 맥아더를 귀찮게 했고 맥아더는 몇분간의 알현을 허락했습니다. 그가 맥아더를 잠시 봤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를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맥아더를 인용하면서 맥아더가 지금 이곳에서 미국인들이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떠벌리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그들이 하려는 노력과 관련해서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략)”
|
1947년 4월21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만(오른쪽부터)과 중국에서 귀국한 이청천(지청천)을 김구와 김규식 등이 나와 환영하고 있다. 이청천은 이날 이승만과 함께 장개석(장제스)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독립기념관 소장
|
|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자신의 고문이자 이승만과도 절친했던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7.1.28)의 일부. 그는 이 편지에서 욕설(son of a bitch)까지 사용해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
|
1946년 말에서 47년 초까지 이뤄진 이승만의 미국 방문을 위해 우익단체들은 외교후원금을 대거 거둬들였다. 이 때문에 미군정은 이승만의 방미 목적 중 하나는 정치자금 모금이라고 분석했다. 인촌 김성수가 낸 후원금 100만원에 대한 영수증. 연세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
|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고문이었던 굿펠로가 하지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에서 굿펠로는 한국의 쌀값 폭등을 가벼운 문제로 여겼다. 정용욱 교수 제공
|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