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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1 09:16 수정 : 2019.12.23 13:23

김구 선생(가운데)이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 북으로 가던 도중 개성에서 북서쪽으로 7㎞ 떨어진 여현의 삼팔선 표지 앞에서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으로 본 해방 30년>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5) 마지막 회- 백범 김구의 북행과 남북협상

‘조선문제’ 미국 주도로 유엔 이관
소총회에서 ‘남한 단독선거’ 결의
김구·김규식, 북 김일성 등에 편지
북이 남북정치협상 화답하자 북행

미군정, 겉으론 “지원도 방해도 않아”
실제론 두 사람 북행 저지 애써
48년 4월 정치협상 합의 실천 안되고
결국 남북은 6·25 비극으로 치달아

김구 선생(가운데)이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 북으로 가던 도중 개성에서 북서쪽으로 7㎞ 떨어진 여현의 삼팔선 표지 앞에서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으로 본 해방 30년>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이 1948년 2월16일 백연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서한을 보냈다.

“백연 인형(仁兄) 혜감(惠鑑) (중략)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런 사람이 없지 아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기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인형이여 이리해서야 되겠나이까.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 쪼개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걸개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우사 인형과 제(弟)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인형이여 김일성 장군께는 별개로 서신을 보내거니와 인형께는 수십 년 한곳에서 공동분투한 구의(舊誼)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지도자회담을 최속한 기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지단어장(紙短語長)하여 미진소회(未盡所懷)하니 하루라도 일즉 회음(回音)을 주소이다.”

1948년 2월16일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정치지도자회담을 제의하기 위해 북한의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백범 김구 전집> 8권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낸 답신의 일부. <백범 김구 전집> 8권

1946년 2월14일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식에서 문서에 서명한 이름들을 낭독하는 김규식 박사(서 있는 이). 그의 오른쪽은 이승만과 김구.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표 중 4표 찬성, 단독선거 가결

김구, 김규식, 이승만을 당시 우익 3거두로 칭했던 만큼 이 편지는 이승만을 제외한 남의 두 거두가 북의 두 지도자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요청한 것이다. 김두봉은 당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이었고,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김구는 1944년 가을 중국 국민당 구역인 충칭에 머물 때 공산당 구역인 옌안에 머물던 김두봉과 서한을 주고받으며 항일공동전선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불발로 끝났던 것을 상기시키며 이번에는 기어이 지도자 회담을 성취시키자고 호소한다.

양 김씨가 이 편지를 발송하기 직전인 2월13일 미국과 중국은 유엔에 소총회 소집을 제안했다. 소총회는 총회와 총회 사이에 개최하여 여러 국가들 간에 서로 상충하는 안건을 심의한 뒤 안전보장이사회나 총회에 상정할 수 있는데, 당시 소련을 비롯한 몇 나라가 총회에 참가하지 않자 미국과 중국은 소총회를 개최하여 조선 문제 토의를 첫 안건으로 제출했다. 소총회에서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조선 문제에 대한 보고에 이어 격론이 벌어졌다. 위원단은 미국이 조선 문제를 1947년 10월 유엔총회에 상정한 뒤 소련의 불참 속에 유엔총회가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위원단 파견을 결의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우크라이나도 지명되었으나 참여를 거부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한국에 도착하여 남한의 지도자들과 선거 감시 및 관리 방안을 논의했으나, 소련군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출입을 거부함으로써 유엔총회가 결의한 전조선 선거는 실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위원단은 남조선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할 것인가를 심의했지만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렸다.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프랑스는 단독선거라도 실시하자고 주장했고, 호주, 캐나다, 인도, 시리아 대표는 반대했다. 결국 위원단은 독자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엔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1948년 2월26일, 소련 등 공산진영 11개국이 불참하고 11개국이 기권한 상태에서, 캐나다와 호주를 제외한 31개국이 찬성하여 위원단이 선거 가능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위원단은 논란 끝에 1948년 5월 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 캐나다), 기권 2(인도, 프랑스)로 가결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극우단체를 제외한 한국 내의 모든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소총회 결정이 있기 전부터 단선(단독선거) 반대 국민운동의 전개를 협의 중이었는데 유엔 소총회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자 김구는 그 결의가 ‘한국 문제에 대한 유엔 결정에 위배되는 남한 단선을 실시키로 한 것은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에 선고한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3월18일 개막한 독촉국민회 전국대표대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는 ‘결의안이 일국 신탁을 강요하는 것이고, 38선을 국제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동족상잔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유엔 소총회 결정은 한국 사회의 단선·단정(단독정부)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남한 단독선거 실시가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김구, 김규식의 편지는 그렇게 분단의 위기가 날로 깊어지는 가운데 북에 전달되었다. 북은 3월25일 밤 평양방송을 통해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 명의로 유엔 결정과 남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적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14일부터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방송이 있은 날 김일성, 김두봉은 연서로 김구, 김규식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인편으로 27일 전달되었다. 북의 양 김씨는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별개로 남과 북의 소범위 지도자 연석회의를 4월 초에 평양에서 개최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로써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최후 노력인 남북협상이 성사되었다.

남한 문화인도 단독선거 반대 성명

미군 점령당국은 남북협상을 공공연하게 반대할 경우 몰아칠 역풍을 고려하여 ‘지원도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하며 냉소를 보냈지만 본국의 국무부나 미군정 모두 남북협상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미국은 특히 김구, 김규식의 북행을 저지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양 김씨의 북행이 일정에 오른 남한 단선과 단정 수립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유엔의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점령기간 내내 지지를 표명했던 우익의 두 거두가 미국 측 한국 문제 해결방안에 대한 반대를 명확하게 하고, 한국인에 의한 독자적 해결방안을, 그것도 남북 합작을 통해서 추진하는 것은 미국의 대한 정책과 점령 정책 모두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1948년 4월19일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출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우익 청년과 학생들이 서울 경교장 문 앞에 모여 있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이승만 역시 남북협상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단정 추진세력은 양 김씨의 북행을 만류하고 저지하는 데 총력을 집중했다. 극우 계열의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김구의 노선 전환을 비난하거나 그에게 공산당의 계략에 말려들지 말 것을 호소했고, 김구의 출발 날짜가 다가오자 극우청년단체 소속의 청년 학생들이 그가 머물던 경교장을 에워싸고 그의 출입을 봉쇄하는 등 실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남한 사회의 반응과 분위기는 당시 지성계를 대표하는 문화인 108인이 4월14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난다. 성명에는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유진오는 물론 언론인 설의식, 문학자 이병기, 시인 김기림, 정지용, 염상섭, 경제학자 이순택, 최호진, 철학자 신남철, 여성교육가 차미리사 등 좌우를 불문하고 학계, 언론계, 문학계, 교육계 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전략) ‘가능지역’ 선거는… 명목과 분장은 하여튼지 남방의 ‘단정’이 구성되는 남방의 ‘단선’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바이니 38선의 법정적 시인인 것도 두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38선의 실질적 고정화요, 전제로 하는 최악의 거조인지라 국토양단의 법리화요, 민족분열의 구체화인 것도 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 후로 오는 사태는 저절로 민족 상호의 혈투가 있을 뿐이니 내쟁 같은 국제전쟁이요,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다. 동족의 피로써 물들이는 동포의 상잔만이 아니라 동포의 상식(相食)만이 아니라 실로 어부의 득을 위하여 우리 부자의, 숙질의, 형제의, 자매의 피와 살과 뼈를 바수어 바치는 혈제의 참극일 뿐이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략)”

김구가 그 무렵 보여준 정세 인식이나 그가 견지한 노선도 그렇고, 위의 문화인 성명도 분단이 필연적으로 외세의 종속을 초래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동족상잔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단호하게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구는 단선을 위한 유권자 등록이 실시되고, 또 극우 청년 학생들이 그를 막아서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손수건 하나 챙기지 못한’ 채 북행길에 올랐다. 4월19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남북협상은 참가자들이 ‘외국군대 즉시 동시 철거, 외국군 철수 후에도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단선단정 반대와 불인정’을 합의하는 데 이르렀으나 그 합의는 어느 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내쟁(內爭) 같은 국제전쟁이요, 외전(外戰) 같은 동족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다.

남한의 문화인 108명이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조선중앙일보> 1948년 4월29일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인민군 병사의 총구멍 난 수첩

돌이켜보니 백범 김구의 입국 서약 편지와 일본 거주 어린이가 현금 천 엔 이상을 소지하고 귀국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점령군 당국에 호소한 편지로 시작한 지난 1년간의 연재가 남북의 지도자들이 주고받은 편지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인용한 편지들은 낱장의 편지에 불과했지만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을 나름대로 증언하는 구실을 했다. 그 격동의 시대를 규정한 구조적 조건, 흑막의 뒤편과 무대 앞쪽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엮어낸 천변만화의 활동들, 당시 한국 사회가 뿜어낸 열기와 광기를 어찌 한두 장의 편지로 드러낼 수 있을까마는 필자가 편지 속에서 읽어내려고 노력한 당대의 습속과 정신을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었다면 필자로서 그것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을 듯하다.

편지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6·25전쟁 와중에 미군이 인민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들 속에서 병사수첩 하나를 발굴했다. 펼쳤을 때 왼쪽 상단과 하단이 피로 붉게 물든 이 수첩은 동부전방연락소 연락병 강신현의 것이다. 당시 연락병은 대부분 소년병들이었다. 이 수첩을 상자에서 꺼내드는 순간 털썩 의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수첩은 아마 병사의 상의 가슴 쪽 주머니에 들어 있었을 테고, 왼쪽 하단을 총알이 관통했다. 주변으로 선명한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면 한면 빼곡하게 적힌 잡다한 내용보다 수첩 자체가 그 어떤 자료보다 분단의 비극을 절절하게 재현한다.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이 자식들의 제사상을 차리는 일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인민군의 연락병이었던 강신현의 병사수첩. 총탄이 지나간 흔적과 핏빛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미군이 노획한 문서 중 하나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청에 보관돼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인민군 연락병 강신현의 병사수첩의 일부. “높은 고지에서 적의 포격과 비행기 기총소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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