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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0 16:36 수정 : 2019.12.31 02:45

[짬]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는 2월 정년 퇴임한다. 강성만 선임기자

태평양의 아름다운 섬인 사이판이나 팔라우는 한국인에게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이 섬들이 1914년부터 45년까지 일본이 식민 지배한 남양군도의 일부라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지금은 미크로네시아로 불리는 남양군도는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와 캐롤라인, 마셜 제도 등에 속한 섬들을 포괄한다.

내년 2월 정년 퇴임하는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3년부터 재작년까지 남양군도를 여섯 차례나 찾았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되거나 과대 광고에 속아 이주한 선조의 흔적을 찾아서다. 나라 잃고 남양군도로 간 조선인 9천여 명의 상당수는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에 휘말리거나 혹은 굶어 죽었다. 일부이지만 자발적으로 이주해 돈을 모아 무사 귀환한 이들도 있다.

<남양군도의 조선인> 표지

조 교수가 최근 낸 책 <남양군도의 조선인>(당산서원)에는 남양군도 조선인들의 각기 다른 생의 모습이 담겼다. 28일 서울 신촌역 근처 카페에서 저자를 만났다.

제주 출신 고명려는 1920년께 도일해 일자리를 찾다 우연히 남양군도로 간다. 얍 섬에서 야자 열매 수집상으로 부를 일군 뒤 요리점도 열었다. 다행히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터지기 전에 돈을 베개에 숨겨 가족과 함께 귀향했으니 그에게 남양군도는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소수에 불과하다.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이 남양군도에 비행장을 지으려 해군 군속으로 끌고 간 조선인만 2500~3000명이었다. “정확한 사망자 통계는 없어요. (남양군도의) Wotje 환초로 끌려간 제주 출신 군속 58명 중 26명만 생환했어요. 이런 통계에 바탕해 사망자가 상당수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죠.” 미군은 1944년 1월 콰젤라인 환초 등 남양군도 일부 섬만 점령하고 Wotje 환초 등 나머지 섬은 상륙 작전을 미루고 봉쇄에 들어갔다. 종전까지 1년 6개월가량 섬에 갇힌 일본군과 조선인 군속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 일본군이 조선인 군속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남양군도 환초를 가 보니 굶주림이 이해되더군요. 섬이 가늘게 이어졌는데 폭이 5~10m 정도밖에 안 되는 곳도 있어요. 먹을 것을 찾을 길이 없겠더군요.”

조 교수는 2015년에는 남양군도 거주 조선인 3세 인터뷰 등을 통해 <남양군도-일본 제국의 태평양 섬 지배와 좌절>이란 책도 냈다. 남양군도 조선인을 다룬 한국인 최초의 책이었다. 2년 전엔 남양군도 조선인 1세대 전경운(일본명 마쓰모토)의 회고록도 엮었다.

무엇이 그를 남양군도로 이끌었을까? “2008년 제주 4·3 평화공원 기본 계획을 만들 때 도움을 얻으려 오키나와를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남양군도 전시를 본 게 계기였죠. 자신들이 남양군도에서 당한 고난을 강조했더군요. 한편으로는 식민 통치하며 누렸던 영화를 되찾고 싶은 마음도 엿보였어요.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죠.”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목표로 2005년에 출범한 정부기구는 딱 10년 활동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해산했다. 조 교수는 “강제동원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수록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며 정부가 연구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주문했다. “진상규명 위원회가 활동할 때 조사관들이 현장 답사나 인터뷰도 하며 신고 내용에 대해 사실 확인을 했어요. 그런데 위원회 해산 뒤 이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몇 사람에게 자료를 받아 이용했어요.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젊은 연구자들도 키워야겠죠.”

3년 전에는 제주·오키나와 학회를 만들어 지금껏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 학자 3명 등 회원은 20여명이다. “제주대의 오키나와 연구자들과 오키나와 류큐대 교수 몇 사람이 같이 합니다. 제주대에서 두 차례 모여 발표했고 내년 2월엔 류큐대에서 하기로 했어요.”

‘남양군도의 조선인’ 등 책 2권

내년 2월 정년퇴임 앞두고 출간

2013년 이후 여섯 차례 현지 조사

제주·오키나와 학회 4년째 이끌어

“지사가 나서 군사기지 반대하는

오키나와 평화교육 배우고 싶어”

제주와 오키나와는 공통점이 있다. 군사기지화를 추진하는 중앙정부와 이에 맞선 주민의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평화 교육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오키나와는 전쟁과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제주와 달리 중앙정부의 군사기지화 시도에 잘 맞서고 있어요.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 비행장을 현내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발표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 이전 예정지의 기초공사도 끝내지 못했죠. 주민들이 뭉쳐 반대 운동을 하고 있고 그 중심에 지사가 있어요. 제주와는 다르죠.”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표지

서울이 고향인 조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조선 후기 서울주민 신분구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85년부터 제주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퇴직 뒤에도 1인 출판사를 하는 아내와 함께 제주에서 살 계획이다.

4·3의 비극을 겪은 제주 사람들에게 평화의 의미는 더 각별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주의 문제를 풀면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풀린다고 봐요. 평화도 막연히 말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말해야죠. 제주 일본군 전적지나 4·3학살 현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평화 메시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 참화로 고통을 겪은 남양군도 조선인들도 그렇고요.”

그는 이번에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당산서원)란 책도 같이 냈다.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난 신흥종교 창가학회가 박정희 정권 초인 1964년 포교 금지를 당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일본과 굴욕적 협정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이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창가학회를 제물로 삼아 반민족적, 반국가적 종교로 낙인 찍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대학에서 30년 동안 종교사회학 강의를 해온 조 교수는 90년대 후반부터 창가학회 연구를 해왔다. 그는 책의 함의를 묻자 두 가지를 말했다. ‘우리 내면의 반일의식’과 ‘유사 종교 프레임’이다. “창가학회 포교 금지는 권력이 어떻게 국민의 반일 감정을 이용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지율이 바닥일 때 갑자기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이죠.” 말을 이었다. “제 강의 수강생들을 봐도 불교, 가톨릭, 개신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다 이상하게 봐요. 한국인들은 근대 이후 새로 구성된 신흥종교를 제대로 된 종교로 보지 않아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모르몬교 등 미국에서 들어온 종교도 그렇고, 한국의 오랜 종교인 천도교나 증산교도 종교 대접을 받지 못해요. 반면 불교가 아무리 깽판을 치고 개신교가 난리를 쳐도 정상적인 종교로 봅니다. 승려나 목사들이 주도하는 ‘종교의 정통성’ 주장이 이런 인식에 영향을 미쳤죠.”

계획을 물었다. “오키나와의 전쟁 유적 및 기념물을 중심으로 한 전쟁의 기억과 평화교육에 관한 연구를 계획하고 있어요. 오키나와 곳곳에 흩어진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관련 추모탑 이야기가 중심이 될 겁니다. 일본 창가학회의 초기 성장 과정과 창가학회가 만든 공명당이 21세기 이후 자민당과 연립정권이 된 이후 맞닥뜨린 상황을 논의하는 책도 쓰려고 해요.”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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