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1 17:17
수정 : 2005.03.11 17:17
■ 전국명소 4선
회색 겨울은 춘삼월이 되도록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남풍은 언제쯤 이 도시로 불어와 진달래, 개나리 만개한 봄날을 열어줄 것인가. 지친 겨울의 끝, 미처 닿지 않은 봄을 기다리다 문득 동백꽃 생각이 난다. 겨울에 피고 봄에 지는 꽃. 봄꽃 아닌 봄꽃, 동백꽃은 3월을 닮았다. 3월은 동백이 가장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때다.
강원도 구전 민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동백아 피지 마라 건너집 숫처녀 다 놀아난다” 긴 겨울이 끝날 무렵 동백꽃의 강렬한 붉은 빛에 가슴 설렌 처녀들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나서면 동네방네 핑크빛 로맨스가 시작된다는 얘기일 게다. 겨울에 꽃이 핀다 해서 동백(冬柏)이라 이름 붙은 동백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수다. 한겨울에 꽃망울을 머금었던 동백은 2월 초 남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꽃을 피우기 시작해 3~4월이면 그야말로 흐드러진다. 색이 선명하고 큼지막한 꽃송이는 꽃샘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하게 자태를 뽐내다 절정이라고 생각될 쯤 느닷없이 송이째 떨어진다.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피워올린 빨간 꽃송이가 슬프도록 강렬해서일까.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동백에 얽힌 전설들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사랑하던 남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한 뒤 기다림에 지친 여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남자가 돌아와보니 여자의 무덤가에 빨간 꽃이 피었더라는 줄거리의 전설이 일본, 중국, 프랑스 등지에서 전해진다.
3월 초부터 동백꽃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여수 오동도나 해남 보길도 같은 남도의 바닷가다. 남도를 어루만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북으로 불어들면서 강진 백련사와 고창 선운사, 영암 월출산 등 산등성이 동백 꽃망울에 가닿는 것이 3월 중순이다. 지역별로 동백꽃이 한창인 때를 골라 축제를 벌이기도 하니, 미리 알고 떠난다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거제 야생 동백군락지 _
해안 따라 늘어선 3만여그루서 꽃 만개
거제도 학동 몽돌해안을 따라 늘어선 3만여그루의 동백은 3월이면 일제히 꽃을 피운다. 이웃한 섬 지심도와 외도에도 동백이 만개한다. 거제는 옛부터 유명한 동백 서식지였는데, 나라에서 큰일을 당해 거제로 유배온 사람들이 동백꽃을 마뜩찮게 생각해 많이 뽑아냈다고 한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목이 잘리듯 ‘툭’ 하고 떨어지는 꽃송이가 불길하고 서글픈 느낌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거제시에서 꾸준히 심고 가꾼 덕택에 옛 명성을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 거제 동백 관광은 외도와 해금강을 거쳐 학동 동백숲에 들르거나 학동 동백숲에서 출발해 해금강을 거쳐 여차해변으로 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가는길 = 경부고속도로 서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서마산에서 나온다. 고성, 통영을 지나 거제대교를 건너면서 해안도로를 타면 학동으로 갈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장승포나 통영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거제 각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 서천 마량리 동백정 _
천연기념물 동백숲 독특한 자태 뽐내
서천 마량리에 있는 동백정 근처에는 5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85그루의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169호)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숲은 다른 동백숲과 달리 2미터가 채 안 되는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량이 동백나무의 북방한계선인 까닭이다. 이곳 동백은 키가 작은 대신 가지가 넓게 벌어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숲은 주변 우뚝한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져 빼어난 해안경관을 이룬다. 마량리는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백숲을 돌아본 뒤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백정에 올라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고, 마량포구에 들러 이곳 명물인 쭈꾸미 요리를 맛본다면 알찬 여행이 될 듯. 제5회 동백꽃·쭈꾸미축제가 3월27일부터 4월10일까지 동백숲 근처에서 열린다. 축제 문의는 서천군청 문화공보실(041-950-4224).
가는길 = 서해안 고속도로 춘장대에서 빠져나와 우회전, 5분 정도 달리면 검문소 사거리, 다시 우회전해 10분 정도 가면 동백정이다. 대중교통은 서천까지 버스, 혹은 기차로 가서 마량리까지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고창 선운사 동백숲 _
절 빙둘러싼 나무에 시인들 자취 서려
선운사 동백꽃을 보면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 불어 설운 날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보면 나를 떠나려던 님도 차마 나를 못 떠날 것”이라던 송창식의 <선운사>. 님이 나를 못 떠나는 이유는 선운사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두둑’ 지기 때문이었다. 선운사 동백꽃을 즐기려면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3월 초에 가면 서정주의 시처럼 “동백꽃은 못 보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만 듣고 돌아서야 할지도 모른다. 너무 늦으면 시인 최영미가 노래한 대로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인 동백꽃의 인상적인 최후,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슬픈 모습만 보고 오는 경우도 있다. 3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하는 선운사 동백꽃은 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5천평 정도 펼쳐져 있다. 절을 끼고 빙 둘러선 1만여그루의 동백은, 이곳을 노래한 시인들의 자취 때문인지 유난히 정감 있다.
가는길 =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산에서 빠져나와 22번 국도를 타고 오산저수지를 지나 반암삼거리서 우회전, 선운산 도립공원까지 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정읍이나 고창행 고속버스를 타고 선운사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 철도청에서는 선운사 동백과 내소사 왕벚꽃 KTX여행(4월6∼14일, 5만1700원), 청보리밭 축제와 선운사 동백꽃 KTX여행(4월18일∼5월8일, 5만6200원) 등 관련 상품을 판매 중이다. 문의는 철도고객센터(1544-7788).
*강진 백련사 동백과 다산초당 _
전차 마시며 동백꽃 내음에 취해
전남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8년 동안 귀양생활을 한 곳이다. 다산이 기거했던 초막인 ‘다산초당’에서부터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이 천연기념물(151호)로 지정된 동백숲이다.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주요 저서를 집필하며 오가던 산책로라 한다. 3천여그루 동백나무가 2만여평에 걸쳐 펼쳐지는 백련사 동백숲은 동백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시대를 앞서간 거인 다산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더욱 뜻 깊은 곳이다.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은 ‘다산’(茶山), 즉 차가 나는 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서기 1200년경 원묘국사가 이곳에 살면서 주위에 차마을을 만든 것이 별명의 유래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인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백련사는 각종 차로도 유명한데, 특히 엽전 모양을 닮은 ‘전차’는 이곳에서만 만드는 귀한 차다. 백련사 스님들은 전차를 마시면서 간식으로 동백꽃잎으로 전을 부친 동백화전을 즐겨 먹었다고 하니, 여행길에 한번쯤 맛보아도 좋을 것 같다.
가는길 = 강진서 해남으로 가는 1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다산초당 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완도 방면 2번 군도로 6㎞ 정도 달리면 된다. 대중교통은 고속버스로 강진까지 와서 만덕리행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이미경 / 자유기고가 friendlee@hani.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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