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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5 19:40 수정 : 2017.09.16 01:10

[토요판] 이재언의 섬
(7) 어청도

전라북도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속한 어청도는 군산항 서쪽으로 72㎞, 중국 산둥반도로부터는 300㎞ 떨어져 서해 최남단의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보물 같은 섬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어청도 전경. 이재언 제공
어청도엔 인천 팔미도에 이어 1912년 두번째로 유인 등대가 세워졌다. 이재언 제공

물이 거울과도 같이 맑다 하여 이름 붙은 섬. 군산항 서쪽으로 72㎞, 중국 산둥반도로부터는 300㎞ 떨어져 서해 최남단의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보물 같은 섬. 전라북도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딸린 섬 어청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청도는 행정구역 변경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섬이다. 조선 왕조 말엽엔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속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도·개야도·죽도와 함께 전북 군산에 새로이 편입됐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보령시로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당시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보령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앓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그 유명한 황금 어장터가 고스란히 전북 관할구역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어청도는 우리나라 전체로 봐서는 여간 소중한 섬이 아니다. 서해 영해기선 기점에 위치한 어청도는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맡고 있을뿐더러 해군기지도 자리잡아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에 꼽힌다. 오늘날 어청도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알토란 같은 섬이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뿐 아니라 좋은 항구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다. 한창 어획량이 많던 때는 군인 가족 200명가량을 포함해 이 작은 섬의 유동인구가 2천명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인근 바다에서 채취한 홍합을 바라보며 주민들이 활짝 웃고 있다. 이재언 제공

중국 초나라 전횡 장군의 전설

일본은 일찌감치 어청도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은 조선의 바닷길을 장악할 야심을 품고 1892년부터 한반도 연안을 측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미 어청도를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점찍었다. 실제로 어청도에는 19세기 말부터 일본인들이 몰려와 살았다. 1885년에는 일본의 잠수부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기항했고, 1898년엔 인천에서 진출한 20여가구가, 다시 1907년에는 40가구 약 200여명의 일본인이 이 섬으로 몰려왔다.

어청도엔 아직도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게 가옥과 동굴의 남겨진 채굴 흔적. 1903년엔 일본 우편수취소가 들어섰고, 1909년엔 심상소학교가 일본인 어민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 1917년 설립된 어업조합은 서해안 전 지역을 통틀어 두세 번째에 속한다. 인천 팔미도에 이어 두번째로 이곳에 1912년 유인 등대가 세워진 건 어청도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능히 짐작하게 해준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이 등대는 남북항로를 항해하는 모든 선박이 기준을 삼고 이용하는 유인 등대다.

후대 사람들이 진위를 가려낼 순 없으나, 어청도에 사람이 처음 살게 된 유래는 중국의 한 영웅 전설과 맞물려 있다. 바로 전횡 장군이다. 전설의 주인공인 전횡 장군은 기원전 202년께, 초나라 패왕 항우의 부하 장수였다. 치열한 전쟁 끝에 패왕이 오강정에서 자결하자 전횡은 부하 500여명을 거느린 선단을 이끌고 우리나라의 서해를 향해 무작정 항해에 나섰다. 중국 땅을 떠난 지 석달가량 지났을 즈음 일행의 눈앞에 한 섬이 보였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인데도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섬을 발견한 일행은 모두 기뻐 함성을 질렀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를 청’(靑) 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섬에 내려 바다를 보는 순간 모두들 감탄하면서, ‘아! 푸르다’라고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와 섬의 이름으로 감탄사 ‘어’(於)와 푸를 ‘청’을 쓰게 되었다는 얘기다. 전횡은 곧 죽고 말았지만 그 후부터 부하들이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서해 영해기선 기점에 자리잡아
어업전진기지 외에 전략적 요충지
중국 전설 품고 일제도 일찌감치 눈독
역사·자연·문화 어우러진 생명의 섬

주민들이 선착장에서 미역을 말린 뒤 운반하고 있다. 이재언 제공

군산항을 떠나 2시간40분 남짓 파도를 뚫고 달려온 여객선을 받아들이는 곳은 세 겹으로 된 방파제로 이뤄진 부두. 섬 중앙에서 남쪽으로 뻗은 1㎞의 넓고 긴 부두로, 평균 수심이 5m 내외라 대형 선박도 정박할 수 있다. 섬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해안선은 천혜의 피항처로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다. 이곳은 부교가 두 개나 된다. 부교 주위로 많은 고깃배들이 접안해 있다.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라 섬 규모는 작지만, 자동차들이 다닐 순 있다. 아쉬운 건 차도선이 아닌 일반 여객선으로는 차를 싣고 올 수 없다는 점. 집을 짓거나 공사를 하면 비용의 절반은 운송비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열악한 섬이다. 군산에서 어청도까지 차도선을 한번 대절하면 족히 수백만원은 든다.

이러다 보니 주민들은 대부분 군산에 따로 집을 두고 생활하는 편이다. 군산으로 나갔다가 조업과 낚시 관광이 본격 시작되면 어청도에 다시 되돌아오는 식이다. 우럭과 광어, 농어는 물론이고 해삼과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해 봄과 가을철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어청도초등학교 분교 어린이들. 김판용 제공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봉수대

어청도 등대를 돌아보고 정자 전망대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 198m 높이의 서방산당산 가는 길은 온통 풀로 덮여 만만치 않았다. 어청도의 주봉인 서방산 꼭대기엔 원추형으로 된 2층 석축 봉수대 터가 있다. 고려 의종 3년(1148년)에 처음 축조돼 왜구들의 침략을 감시했던 곳이란다. 그러나 봉수대는 17세기 들어 숙종 3년(1677년)에 폐지돼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원래 어청도 봉수대는 우리나라 중부 서해안 지역에서 육지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의 봉화 신호를 외연도 봉수대로, 그다음은 녹도 봉수대, 원산도 봉수대를 거쳐 오천면 수영 망해정에서 충청 수영으로 보고했다. 이곳의 봉수대가 1677년에 폐지된 건 아마도 일본 에도막부가 설립된 이후 왜구의 출몰이 어느 정도 잦아든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산과 바다와 봉수대가 어우러진 어청도의 풍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여기에 오랜 역사와 문화가 함께 깃들어 있으니 더욱 매력적이다. 어디 그뿐이랴. 천문학적인 건설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U자처럼 움푹 들어간 천연 항구가 있기에, 어청도는 축복받은 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역사의 보고. 어청도는 역사와 자연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섬이다.

이재언 국립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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