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4 09:20
수정 : 2018.01.14 11:25
[토요판] 이재언의 섬 ⑭ 거문도
배 만들 목재 찾아 울릉도까지 원정
여수~제주 중간위치의 요충지 탓에
구한말 영국군이 2년간 점령하기도
이웃한 백도 등 이국적 풍경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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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와 여수 중간에 자리잡은 거문도는 전략적 가치가 높아 예부터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섬이다. 동도와 서도, 고도의 3개 섬으로 이뤄진 거문도는 아름다운 절경뿐 아니라 역사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등대가 있는 섬이 서도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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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114.7㎞, 제주도와는 110㎞ 떨어진 섬. 여수와 제주의 중간 거리에 있는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고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면적은 0.42㎢에 해안선 길이는 4.3㎞. 2016년 기준으로 1204가구 2267명의 주민이 이 섬에 모여 산다. 이 섬이 거문도라 불리게 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이 섬에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특히 19세기 말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란 인물이 이 섬에 들어왔다가 김유라는 대학자를 만난 사연이 지금까지 정설처럼 전해진다. 당시 두 사람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이 과정에서 김유의 문장력에 감탄한 정여창이 거문(巨文)이라 칭했다고 한다. 섬의 이름이 거문도로 정해지게 된 일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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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주민들이 방풍나물을 채취하는 모습.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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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거문도는 멀리 떨어진 동해 울릉도와 얽힌 사연이 많다. 거문도 주민들은 1800년대 후반부터 목재와 해조류 채취를 위해 멀리 울릉도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고 한다. 선뜻 믿기지 않지만, 역사 자료도 남아 있다. 왕의 명령으로 울릉도를 찾았던 검찰사 이규원이 남긴 <울릉도 검찰일기>(1882년 4월30일~5월13일)라는 자료를 보면, 이규원이 답사 기간 중 직접 만난 거문도 사람이 84명이나 됐다. 당시 이규원은 한 무리의 왜인들이 울릉도에 불법으로 벌목하러 온 것도 확인했다. 이후 고종 27년(1890년)엔 울릉도를 관찰하는 초대 도감으로 오성일이 임명됐는데, 오성일은 거문도 서도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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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주민들이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인 거문도 뱃노래를 재현하고 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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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지브롤터’라 불리기도
무슨 사연에서 거문도 사람들은 멀리 울릉도까지 뱃길에 나섰을까? 비밀은 풍선(범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목재였다. 당시 남해안 일대 섬과 육지는 조정의 관리 대상이어서 자유로이 벌목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거문도 사람들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던 울릉도까지 가서 목재를 구해왔다. 해마다 봄이 되면 울릉도로 나무를 구하러 떠났다고 한다. 편도로 보통 보름 정도, 날씨가 좋지 않을 땐 20일 정도 걸리는 뱃길이었다. 기나긴 항해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장은 콩 서 말을 볶아 배에 싣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혹시라도 야간 항해 중에 졸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배를 몰까 두려워, 콩을 먹으며 졸음을 쫓았던 것이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에 도착한 목수와 주민들은 현지에서 나무를 베어 새 배를 만들었다. 전복과 소라, 해삼 등 각종 해산물도 채취했다. 울릉도에서 부지런히 생활하다 보면 어느덧 가을. 가을철 하늬바람이 불 때, 말린 전복과 생선, 새로 만든 배에 벌목한 목재를 가득 싣고 거문도로 돌아왔다. 당시엔 일본과 러시아가 울릉도의 삼림자원과 풍부한 수산자원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라, 거문도 주민들의 울릉도 원정은 이들의 무단침범을 어느 정도 몰아내는 효과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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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만 남아 있는 옛 일본 신사 터.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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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거문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고종 22년(1885년)에 일어난 ‘거문도 사건’이다. 거문도는 제주도와 여수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다. 이런 연유로 거문도항은 옛날부터 왜적들을 비롯한 열강의 침입을 자주 받아왔다. 특히 러시아는 이곳을 ‘동양의 지브롤터’라 부르기도 했다. 외세의 대립이 극심하던 구한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했다. 1885년 4월부터 1887년 2월까지의 일이다. 당시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선단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약 2년간 이 섬엔 영국군이 머물렀다. 영국군은 이 섬을 ‘해밀턴섬’이라 불렀다. 영국군이 거문도에 주둔하는 동안, 주민들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영국군이 철수한 뒤 이 섬엔 영국인 묘지 7~9기가 남았다고 하는데, 현재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 3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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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사건 당시 이 섬에 주둔했던 영국군 묘지. 지금은 3기만 확인된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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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점령당하긴 했으나, 거문도 사람들은 선진 문물을 발빠르게 흡수하기도 했다. 내륙 지방보다 앞서 개화한 측면도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김옥균과 박영효가 거문도로 숨어든 건 단지 우연이 아니다. 거문도에 살고 있던 주민 김씨 일가가 이들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30명이 넘는 동도 주민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고 하니, 이 섬이 얼마만큼 신문명에 일찍 눈떴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는 일찌감치 사회주의 사상에 눈뜬 사람도 많았다. 여순 사건(1948년) 이후 이 섬에서도 좌익 활동이 활발했던 건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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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끝 절벽 위에 서 있는 거문도 등대. 여수~제주 뱃길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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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동물 서식처 백도
거문도를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한 경우에 한해, 거문도 등대에서 무료로 일박할 수도 있다. 등대와 관사 사이에는 최대 15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콘도형 휴양소가 마련돼 있다.
거문도 여행과 관련해 덧붙일 게 하나 있다. 거문도까지 왔다가 이웃한 백도를 보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나 마찬가지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 떨어진 백도는 망망한 바다 위에 점점이 뿌려진 39개의 크고 작은 바위섬으로 이뤄진 무인군도다. 백도 안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를 비롯해 눈행나무, 석곡, 소엽풍란 등 353종의 아열대 식물이 자라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가마우지, 휘파람새 등 뭍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동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외국의 어느 섬에 온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는 왜 거문도 일대가 ‘남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지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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