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27 14:45
수정 : 2018.01.27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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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고군산군도의 맨 끝에 위치해 ‘끝섬’이란 뜻을 지닌 말도는 예부터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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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재언의 섬 ⑮ 말도
천연기념물 지정된 신원생대 습곡지형
중국-한반도 뱃길의 중요한 길목
전북 두곳뿐인 유인등대 남아있어
인근 직도 사격훈련장 탓에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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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고군산군도의 맨 끝에 위치해 ‘끝섬’이란 뜻을 지닌 말도는 예부터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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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에서 남서쪽으로 약 40㎞. 고군산군도의 맨 끝에 위치한 섬. 이 섬의 이름엔 ‘말’자가 붙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내 혹은 끝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름하여 말도. ‘끝섬’이란 뜻일 게다. 말 그대로 서해 바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서해의 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주는 섬이 바로 말도다.
말도 선착장에 배를 대고 내리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기암이 있는 해안절벽이다. 남동쪽 해안절벽 1만6190㎡는 2009년 천연기념물 501호로 지정됐다. 바위는 언뜻 보기에 인상을 쓰고 있는 형상인데, 마치 흥에 겨워 웨이브하듯 휘어져 있다. 말도에는 유독 습곡지형이 많다. 약 5억9000만년 전인 신원생대 선캄브리아기의 지질구조라 한다. 군산 말도리 선캄브리아 지층은 대규모 지각운동에 의해 지층이 큰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는 형태로, 말도의 남동해안을 따라 파도에 침식된 절벽에 잘 노출돼 있다. 특히 말도의 습곡구조는 고생대 이전에 압축·변형된 지질구조로, 최소 3회에 걸친 대규모 습곡작용의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의 다른 장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보존가치가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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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등대 전경. 말도 등대는 전북에서 두곳뿐인 유인등대 중 하나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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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에서 바라본 말도 포구 모습. 13가구 주민이 형제처럼 모여 산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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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한양 오가는 세곡선 길목
외지를 오가는 여객선은 마을 입구 선착장에 닿지만 어선들이 정박하는 포구는 마을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마을의 서쪽 고개 너머에 유인등대가 있고, 그 아래가 포구다. 방파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해안도로가 양쪽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마을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고, 왼쪽은 포구와 등대 가는 길이다. ‘말도길’로 명명된 이 해안도로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데,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절벽이자 기암지대다.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유독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그래서 흔히 고군산군도를 ‘호수에 뜬 섬’이라고도 부른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보면, 사신단 배가 서해로 들어오자 고군산군도의 고려 군사들이 영접을 나왔다고 적혀 있다. 고군산군도는 옛날부터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었고, 서남해안에서 세곡을 싣고 개경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여정의 중간 허리였다. 그러다 보니 고군산군도에는 항상 조운선과 병선, 상선들이 들락거렸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난중일기>에 적어놓았다. 이곳을 거쳐가는 건 사람과 배만이 아니다. 바닷속을 오가는 물고기들에게도 이곳은 필수코스였던 것 같다. 말도 바로 아래 칠산어장과 위도 조기 파시, 위쪽의 연평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말도엔 1908년 등대가 설치돼 지금까지 100년 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등대를 처음 설치한 건 대륙 진출의 야망을 꿈꾸던 일본인들이었다. 군함을 동원해 자원과 인력을 수시로 싣고 오가는 일본으로선 등대 건설이 급선무였다. 거문도 등대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들은 말도 등대의 안내를 받았다. 여기서 다시 어청도 등대와 태안반도의 옹도 등대를 지나 경기만으로 진입해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야 비로소 인천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재 전라북도의 유인등대는 말도와 어청도 단 두곳뿐이다. 말도 등대의 공식 명칭은 ‘말도항로표지관리소’. 등대 관리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등대 맨 위로 올라가 바라본 잔잔한 바다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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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의 지층은 약 5억9000만년 전인 신원생대 선캄브리아기의 지질구조로, 해안절벽 일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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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주민들이 캐낸 바지락을 망에 담아 옮기고 있다.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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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는 원래 조선시대 유배지였다. 고군산군도가 처음으로 지도에 표시됐을 무렵 무인도였던 말도는 조선 중엽 한양에서 심 판사라는 인물이 이곳으로 귀양을 오면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말도에는 심 판사를 모시는 영신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당산제에 얽힌 전설이 섬에 전해져 내려온다. 내용인즉 이렇다. 조선시대 머나먼 이곳 말도로 귀양 온 선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조정으로부터 혐의가 풀렸으니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배를 타고 이 섬을 떠나려고만 하면 갑자기 풍랑이 일어 되돌아오기를 10여차례.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모시고 사당을 지으라고 했단다. 그의 말대로 사당을 지어 단검을 모시고 제를 올리니 풍랑이 일지 않고 무사히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말도에서는 마을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뽑아 영신당을 관리하고 제사용 돼지를 새끼 때부터 기르도록 했다. 일년에 두번, 동짓날과 봄에 무게 200근이 나가는 돼지를 잡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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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해안절벽 지대에 자라고 있는 천연송. 이재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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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탄 폭발해 어민 숨지는 사고도
말도 인근은 예부터 황금어장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아름답고 풍요로운 말도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속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다. 바로 섬 위쪽에 있는 직도 사격장 때문. 말도는 직도로부터 직선거리로 겨우 13㎞ 떨어져 있어 공군의 폭격 훈련에 따른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처지다. 직도가 처음 공군사격장이 된 건 1971년. 이때부터 말도와 명도, 방축도 주민들은 소음과 폭발사고 위험에 노출돼왔다. 주택 균열과 스트레스 피해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2000년 2월엔 직도 동남쪽 2㎞ 지점에서 저인망으로 고기를 잡던 어선 형성호의 그물에 불발탄이 딸려 올라오다가 폭발해 선원 한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보다 앞선 1997년 11월엔 직도 서쪽 4㎞ 지점에서 조업 중이던 성일호 선원 한명도 불발탄 때문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문제는 이 일대가 우리 공군의 훈련장뿐 아니라 주한 미 공군의 사격훈련장으로도 쓰이게 된 것. 그간 주한 미 공군은 화성 매향리 사격장을 이용했으나 그곳이 폐쇄되자 직도를 대체지로 골랐다. 40년 넘게 머리에 폭탄을 이고 살아온 주민들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에 주민들은 폭음과 진동 피해, 불발탄 위험, 그리고 황금어장의 상실 등을 이유로 들면서 줄기차게 사격장 폐쇄를 주장하고 있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군산시가 정부 지원금 약 3000억원을 활용해 직도 근해에 살고 있는 섬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아직은 문명의 이기와 거리가 먼 편이다. 항만이 잘 갖춰졌다고는 해도, 주민들은 대체로 겨울엔 가장 가까운 육지인 군산에 나가 지내고 봄에 섬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럼에도 천연송과 천연기념물 습곡지형 등은 말도만이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다. 지리적 특성 탓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섬 말도. 13가구가 형제처럼 모여 사는 말도의 때묻지 않은 자연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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