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⑭초원에서 말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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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살의 푸른둥이다. 인간으로 치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내리막길에서 인간을 태우고 겁없이 질주하는 것은 나와 한몸이 된 그의 눈을 믿기 때문이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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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짜리 푸른 말이
겁없이 내리막을 내달리는 건
자기보다 조금 높은 데 있는
기수인 인간 눈을 믿기 때문
함께 고꾸라지지 않으려면
말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네발 달린 짐승과 사는 건
결국 여섯발 달린 짐승이 되는 것
열살 주흐라는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물통을 나르고 양을 모느라 새까만 손이 봄바람에 탁탁 갈라져서 안쓰럽다. 고사리손을 보면 트라우마처럼 초문명국가의 그 크고 우악스러운 손이 떠오른다. 오늘날 일부 인간들이 갖춘 능력과 행태는 옛 경전의 내용을 속속들이 증명하는 듯하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분”은 “하늘”에 계시며,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엄하고 확고하시며 “불의”(不義)를 용서하지 않으시기에, “악인”에게 불벼락을 내린다. 맨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 높은 곳에서 지상에 사는 인간의 선악을 속속들이 아는 “똑똑한”(smart) 미사일이 응징의 불벼락을 내린다. 이른바 “초정밀 고고도 폭격”. 전지한 분의 전능한 무기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떨어진다. 결혼식장으로, 병원으로, 모스크로, 민가로. 누군가 죽은 딸의 시체를 들고 항의한다. “군인도 테러리스트도 아닌 어린아이요.”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다. 원래 그분은 대의를 위해 가끔 시련도 주시는 분이 아니었던가?
세상일을 뒤로하고 들판으로 나갈 때가 다가온다. 초원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목장을 옮기면서 여섯달 동안 이 계곡 목동들을 모두 만날 것이다. 단짝 푸른색 말을 타고 뒷산 빙하 바로 아래까지 올라가 오십 리 건너편의 자일로를 스케치했다. 계획이 좋아야 결과가 좋을 테니 스케치는 최대한 꼼꼼하게 한다. 예전 씨족장들이 목장을 가늠하고 분배할 때도, 이 봉우리 근처 어딘가에 올랐을 것이다. 멀리 레닌봉 아래 탈라스 친족들의 목장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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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가 튼실한, 차 위에 실린 오른쪽 말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말 고르는 것을 도와주는 마무르(오른쪽)는 저 녀석은 느리다고 말렸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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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체격 보면 성격을 안다
다섯살짜리 푸른 말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내리막이 무섭다. 스케치를 마치고 등에 올라타자마자 언덕을 달려 내려간다. 통제할 수 없는 속도와 힘. 넘어지면 둘은 모두 저승행이지만 흥분한 다섯살 수말은 속도를 높이기만 한다. 언덕을 뛰어 내려오지 말라고 어른들에게 주의를 받았지만 어쩔 수 없다. 뛰고 싶은 이는 내가 아니라 놈이다. 그런 놈을 세우는 것이 더 위험하다. 말이 언덕을 내려 달릴 때 기수는 타르박이 파놓은 구멍을 살펴야 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초원의 지뢰, 빠지는 순간 우리 둘은 어쩌면 다른 세상으로 함께 갈 수도 있다. 그러기에 구멍이 나타나면 말에게 재빨리 신호를 줘야 한다. 혼자 있을 때야 조심스러운 놈이 빠질 리 없지만 못난 기수를 믿다가 빠진다. 놀랍게도 말은 달릴 때 자기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인간의 눈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처럼 최후의 순간 말을 달려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 나같이 오래 살고픈 주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먼저 말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말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으므로 말에게 위험을 알려주되 말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삐질을 해야 한다. 놈이 좋아하는 회전 각도와 보폭을 알아야 위험하지 않다. 열흘 이상 함께하면서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눈 네개와 다리 여섯개를 가진 초원의 하이브리드 괴물이 된다. 왼발로 건드리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발로 건드리면 오른쪽으로 간다. 목덜미를 잡으면 서고, 한국말로 “가자” 하면 가고 “서” 하면 선다. 녀석도 할 말이 많다. 안장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할 때는 어깨 근육을 떨고, 그만 뛰고 싶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키키’거린다. 재갈을 벗겨달라 할 때는 내 어깨에 머리를 문지르며 고양이처럼 애교도 부린다. 그러니 녀석이 좋아하는 풀을 녀석보다 먼저 살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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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을 셋이서 함께 보면서 공부하는 누루술탄과 라빌, 주흐라(왼쪽부터). 얼굴은 꾀죄죄하지만 눈망울은 빛난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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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체격만 보고도 성격을 알아맞히는 마무르(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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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산다고 할 때 무사는 손을 가로저었다. “말이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 달리기 전에 물을 먹이면 안 돼. 그러면 몸이 부어. 달린 직후에 물이나 꼴을 줘서도 안 돼. 그러면 약해져. 비 올 때는 등을 덮어줘야 되고. 말을 키우면 꼼짝도 못해.” 그 밖에도 말을 가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넘친다. 녀석도 감기에 걸리고 잔병치레를 한다. 들판에서 말이 주저앉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안은 덜 민감하고 싼 당나귀다. 그러나 말 트레킹 전문가인 마무르의 생각은 달랐다. 내 육중한 몸에 천막, 가재도구와 책을 당나귀 등에 싣고 이 목장 저 목장을 전전한다고? “말 아니고는 답이 없어.” 마무르는 표정은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니가 당나귀라고 생각해봐.’ 더구나 당나귀는 여름철 급류를 건널 수 없다. 요즘 오일장이 열리면 나와 마무르는 말을 보러 다닌다. 말의 체격을 보면 성격을 대충 알 수 있다고 한다.
“가슴 근육이 좋은 저놈은, 가속도가 빨라.” 스프린터다.
“다리가 굵고 엉덩이 살이 많은 놈은 지구력은 좋지만 빨리는 못 달려.” 짐실이 말이다.
“힘과 속도는 색깔과 상관없어. 어른들 말로는 검둥이가 피부가 좀 더 두꺼워 겨울을 잘 나고, 푸른둥이는 더위에 강하다고 하데.” 겨울 외투를 입은 듯한 검둥이, 시원한 여름 하늘을 닮은 푸른둥이, 놈들 외양을 보면 그럴듯하다.
“다섯살 이하로 골라야 돼. 수컷은 일단 다섯살 넘으면 길 못 들여.” 그건 인간도 그러하다.
■ 풀의 시각을 가진 유목민
하지만 말 시장에서 말도 주인을 고른다! 특히 경주마는 근육질에 성미도 급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다가가면 발을 탕탕 구른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쓰다듬으면 정말 자신을 선택해달라는 둥 멀뚱멀뚱 바라보니 신기한 노릇이다. 작은 염소 녀석들도 마찬가지인데, 새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떼를 쓰면 때리고 차도 별무소용이다.
초원에서 짐승과 살려면 짐승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말이 좋아하는 곳이 있고, 양이 좋아하는 곳이 있다. 이 풀이 며칠 분량인지 가늠하고 이동을 결정해야 한다. 목동은 어린 풀을 보호하면서 가축을 배불리 먹이고자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들의 눈은 양이나 소보다 꼭 몇 뼘만 높은 곳에서, 꼭 같은 곳 방향을 응시한다. 어리석은 목동은 풀도 없는 곳에서 죽치고 앉거나 막상 먹으려 하면 몰아대니 짐승이 괴로워 마른다. 네발 달린 짐승과 산다는 것은 사실 여섯발 달린 짐승이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도시형 인간이 좀 더 ‘원시적인’ 조상들보다, 혹은 좀 더 자연에 더 노출된 이웃들보다 전반적으로 더 과학적이고 폭넓은 사고를 한다는 믿음은 근시안에 불과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벌거벗은 임금님일지 모른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의 채집 인디언들이 수백종의 초본의 이름을 기억하고, 정교한 분류체계를 통해 실생활에 응용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문명과 구분되지만 결코 열등하지는 않은 이 방식을 그는 ‘야생의 사고’라 불렀다. 오늘날 도시인은 식용식물이면 그저 먹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채집 생활자들은 그것이 한해살이인지 여러해살이인지 가려서 캐거나 꺾는다. 여러해살이라면 뿌리를 다치면 안 되니까. 기원전 2천년쯤 이란 동부 일대의 어떤 유목민 부족이라면 봄 새싹을 아예 채집하여 먹지 않을 것이다. 식물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전, 즉 씨앗을 퍼뜨리기 전에 먹는 것은 식물에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은 새싹을 찾아 가축을 모는 대신 좀 더 성숙한 풀을 찾아 이동했을 것이다. 오늘날도 대개 유목민들은 땅을 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다년생 초본을 다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눈을 가진 것이 풀뿐일까. 칭기즈칸의 율법에 의하면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은 이는 중형에 처했다. 흐르는 물에 목욕하면 안 되고, 마시려면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지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 흐르는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이다. 마시는 물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 때문일까? 그 연원과 의미는 훨씬 심원하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물은 세정제지만, 고대의 어떤 부족들 특히 유목부족에게 물은 그 자체로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최소한 2000년 전 조로아스터교도들은 흐르는 물이나 샘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아마도 그보다 수천년 전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공통 규율이었을 것이다. 물은 사람과 짐승이 먹는 것이므로 이를 더럽히면 사람과 짐승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이 물이 대지로 스며들기에 대지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 깨끗한 존재인 물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들은 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을 몸을 씻는 용도로 쓸 뿐만 아니라 차를 씻는 용도로, 심지어 원자로를 식히는 용도로 쓴다. 세상 사물 전체가 전능한 인간을 위해 쓰이는 도구로 바뀌어서 그 자체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다.
그들이 보기에 불에는 더러운 것을 태워서는 안 된다. 태우며 악취를 맡느라 불 자신이 힘들 테니까. 묘목을 베면 안 되고, 특히 어린 짐승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 유목민들이라고 고기만을 위해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 어떤 순록 유목민처럼 전혀 먹지 않으면서 가축을 데리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심지어 가축이 아까워 잘 타지도 않는다. 우리의 문명 밖에 있다고 가정하는 이들의 시야는 오히려 우리보다 복잡하고 심오하다. 흔히 고대 문명의 상징으로 로마의 목욕탕을 들지만, 그보다 먼저 ‘문명화된’ 누군가는 그곳을 지옥의 유황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명은 기나긴 인류사에 비춰 특수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에너지 흐름 측면에서도 예외적인 한 형태에 불과하다. 생성 원리와 중력과 풍화의 영향 때문에, 즉 자연의 원리 때문에 지표에는 흔하지 않은 중금속을 파내어 지상의 인간을 불태워 죽이는 용도로 쓴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사물의 도구화가 극에 달하여 결국 도구적 가치만 남으면, 모든 도구를 구매하는 최후의 도구인 화폐만 스스로 존재할 가치를 얻어 물신(物神)이 된다. 오늘날은 급기야 물신이 분신을 만들어 ‘가상 물신’(화폐)까지 만들어냈으니 세상에서 스스로 운동하는 제1원리는 물신인 듯하다. 그 물신은 그 소유자이자 자기 종인 인간에게 전지전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모든 사물의 신성을 제거하고 오직 한 사물에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회 역시 특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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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에 장 보러 온 1974년생 친구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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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밀하고 예쁜 건 낮은 곳에 있어
말을 두세시간 타고 방으로 들어가면 녀석의 향기가 진동한다. 대학 시험을 한달 앞두고 매일 찾아와 영어를 배우고 가는 굴자트에게 물어봤다. “아저씨 말 냄새 싫어?” “아뇨.” 녀석은 내가 보기에 아주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냄새는 사실 풀 향기처럼 구수하다. 그런데 우리들 학교에서 누군가를 따돌릴 때 제일 먼저 “냄새난다”고 한다. 직접 보고 겪은 일이다. 아이들은 어디서 이런 ‘문명의 사고’를 배워온 것일까? 더러운 유목민, 더러운 검둥이, 더러운 되놈, 더러운 노동자의 계보가 이어져 이제 더러운 동급생이 등장했다. 실제로 유목민의 아이들은 다 ‘더럽다’. 꾀죄죄한 얼굴에 새까만 손, 그래서 물과 대지와 피부 미생물의 관점에서는 죄를 덜 지은 아이, 그러기에 인간 냄새를 더 폭폭 풍기는 귀염둥이들이다.
인간의 땅에 서야 인간이 보인다. 90도 각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평면으로 보이겠지만 지표는 변화무쌍하게 울퉁불퉁하다. 세상을 손바닥처럼 내려다보는 전지한 이인 양 하늘에서 ‘비문명인’에게 폭탄을 퍼부어대는 그들은 인간의 땅에 서지 않았으므로 사실은 철저하게 무지하고 그만큼 잔인하다. “고고도 폭격”이 지나간 곳에, 그 화약을 자양분으로 하여 알카에다, 아이에스(IS) 등 끝없는 새 독버섯이 자라고, 대신 물기를 필요로 하는 평화의 씨는 불타버린다.
사회과학자로서 인간의 땅에서 인간들을 살피는 것은 답답하고 지리멸렬하다. 지구는 둥글어서, 언덕 너머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하늘로 떠올라 한꺼번에 전부를 보고 싶다. 그러나 세밀하고 예쁜 것은 거의 낮은 곳에 있고, 내밀한 것은 다가가야 겨우 보인다. 말의 눈에 풀이 보이고, 풀의 눈에 물이 보이고, 물의 눈에 조약돌이 보이듯, 친구의 눈에만 친구가 들어온다. 그러니 오늘도 여섯발로 내일도 땅바닥을 걸어 다닐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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