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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1 18:13 수정 : 2020.01.01 18:13

[한겨레21]
한류(K), 국가 브랜드지만 국가 주도는 경계…
문화산업이지만 지나친 상업성은 반감

2020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다시 ‘케이’(K)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K콘텐츠, K뷰티, K푸드를 묶어 3K로 이름 지었다. 이와 연계해 K-컬처 페스티벌을 연 2회 열겠다고 다시 강조했다. 소비 대책의 중심은 또다시 3K와 연계한 코리아 세일 페스타다. 중소기업 국외 진출을 위한 브랜드K 확산 전략도 수립한다. K가 정책 곳곳 어지럽게 떠다닌다.

2008년 5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가수 겸 연예기획자 박진영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 “콘텐츠·뷰티·푸드 ‘3K’로 경제 활성화”

문재인 정부 들어 소비 대책은 주로 소득 확충과 국민 여가 지원 정책으로 채워왔다. 중소기업 대책은 공정한 생태계 구축으로 대개 모였다. 그래서 소비와 중소기업 대책 자리에 난데없는 K의 범람은 다소 의외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다. 3K가 요즘 유행이고 이것을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연계해보려고 했다.”(고광희 기획재정부 종합정책과장) 사실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꺼내들기 조심스러워했을 뿐 한류, K, 대한민국 브랜드 같은 얘기는 30년 가까이 주문처럼 반복됐다. 당연히 중요하지만 굳이 얘기하기는 멋쩍은 수사, 제시한 쪽도 읽는 쪽도 별 의미 없이 흘려보낸 접두사 K는 2020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34번 반복된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됐어 됐어 됐어’(<교실 이데아>) 외쳤다. 문화가, 권위주의를 깨부수는 듯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김영삼 대통령은 지시한다. “부가가치가 높은 문화산업을 육성시키고 일반 공산품에 문화의 옷을 입혀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라.”(1994년 1월 대통령 업무보고) 이제는 힘 잃은 권위주의의 자리를 세계화와 시장주의, 부드러운 국가주의가 채우는 모습이다. 문화로 일구는 일류국가. 우리만의 목표는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문화를 앞세워 국가의 힘을 키우는 ‘연성 국가주의’ 개념이 등장했다.(원용진, ‘한류정책과 연성국가주의’)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는 쇠락하는 제조업을 대체할 디자인, 음악, 소프트웨어 같은 문화산업을 국가 차원으로 확대해 ‘쿨 브리타니아’를 선언했다.(김어진, ‘창조경제의 정치경제학’) 문화는 산업이 됐고, 세계화 시대 국가의 정체성을 이룰 중대한 지점에 섰다. 본래 문화가 지닌 다양성, 자연스러움, 자율성 같은 가치가 상업화나 국가주의와 어울리는 쌍일지에 대한 고민의 씨앗은 있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는 않았다.

1990년대 후반 또는 2000년대 초반. “아마 제가 12살 때였던 것 같은데, 클론이 대만에 왔어요. 아직 한국 음악이 대중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꽤 쿨하다고 생각했어요.” 대만 타이베이에서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는 리우칭웨이(35)에게 “아주아주 오래전” 처음 접한 한류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꽤 쿨한 것이었다. S.E.S., H.O.T. 음반을 사 모았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니 “<엽기적인 그녀>가 뜨면서 한류는 모두가 보고 부르는 것이 됐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얘기하는 그의 답메시지에는 부끄러움을 담은 말줄임표가 잦다.

점점 관심이 식었다. 새로운 것은 이내 대중적인 것이 됐고 대중적 성공 전략을 따른 비슷한 모습과 서사가 반복됐다. “어쩌면 대만에 그런 대중문화만 한류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일 것 같기는 해요. 다만 비슷비슷한 모습의 가수나 드라마를 보면서 흥미가 사라졌어요. ‘한국이 최고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도 불편하고. 제 취향 문제일 수도 있어요.”

2016년 4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배우 송중기씨와 K스타일 허브 개관 행사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업식 마케팅·사익 추구의 장 된 한류

2001년 마침내 정부는 ‘문화산업 비전21’과 뒤이은 ‘한류산업 지원육성 방안’을 통해 ‘한류’ 단어를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사업 안에 넣는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드라마 <겨울연가> 같은 대박이 터졌다. 다만 생각지 못한 국외 반응 탓에 고민이 같이 움텄다. “H.O.T.가 2000년에 중국에서 공연한 뒤로 현지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죠. 그 충격은 곧 한국 문화에 대한 경계로 연결됐기 때문에 이후 한국 공연 자체가 금지됐어요.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야 했습니다.”(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 2018년 <한류와 문화정책> 인터뷰에서)

2008년 이후.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을 콘텐츠산업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앞서 제조업에 대해 그래왔듯 국가가 자원을 모아 콘텐츠산업을 지원하고, 성과 창출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학계에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전 정부가) 최소한의 문화적 공공성을 문화정책 이념으로 추구한 데 반해, (이명박 정부는) 문화를 ‘콘텐츠 상품’으로 축소하고 특정 문화상품, 즉 한류 콘텐츠의 수출을 신장하기 위해 국가를 ‘브랜드화’하는 등 노골적인 기업식 마케팅 전략을 펼친 것이다.”(최영화, ‘이명박 정부의 기업국가 프로젝트로서 한류정책’)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로 넘어오면서, K콘텐츠 범위는 음식·교육·스포츠 등 사회 전 분야로 넓어졌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사적 이익 추구(K스포츠재단 설립 비리 등)가 문제 되며 불명예스럽게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그리고 한동안 ‘K’는 정부 경제정책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쌍방향 소통, 문화산업의 공정성을 강조한 ‘착한 한류’ 기조 정도가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에 포함됐을 뿐이다.

다시 2020년의 코앞. 한류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절반 가까이 게임산업 덕이긴 하지만, 2018년 문화콘텐츠 수출액은 75억달러(약 8조7천억원)로 한국의 또 다른 자랑이던 가전 수출액(72억2천만달러)을 넘어섰다.(수출입은행, ‘한류 문화콘텐츠 수출의 경제효과’) 다만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복잡한 고민은 여전하다. “어떤 선이 있다. 국가 브랜드를 앞세워도 지나치게 국가적 기획처럼 비치지 말아야 하고, 상업적 가치가 중요하지만 상업성에 치중한 것처럼 보여선 안 되는 선.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가야 한다.”(원용진 서강대 교수)

경제정책 방향에 포함된 한류 예산 사업들을 짚는 국회 예산정책처 평가에도 비슷한 우려가 섞여 있다. “한류 성장 국가를 중심으로 한류의 공격적 진출, 지나친 상업성 등에 반감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부 주도 한류 확산 정책의 타당성과 효과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국회 예산정책처, 2020년도 예산안 분석)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에서 가수 방탄소년단, 배우 김규리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획’으로 포장 어려운 사회 성숙 뒷받침 필요

대만의 리우는 한류를 활용한 관광 활성화나 수출 대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효과가 있을 수 있겠죠. 나는 별로 감흥이 없지만.” 이윽고 사회와 문화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담은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사람들은 한국의 팝 문화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요. 뉴스로 보는 한국은 과도하게 경쟁적이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데 한류로는 똑같이 포장된 (행복한) 모습만 나오니까요. 문화에는 자연스러움과 다양성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사회가 먼저 솔직해지고 다양성에 관대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더는 기획으로만 포장하기 어려운, 사회의 성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국 문화. 한류 소비 1세대 리우는 한류 상품을 넘어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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