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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6 08:58 수정 : 2020.01.06 09:52

[더 나은 사회]
새해 기획 | 균형발전, 도시혁신이 답이다
- ① ‘동독 지역의 거점’ 라이프치히

열차로 최대 24시간 안에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은 ‘유럽의 물류 중심지’ 라이프치히의 가장 큰 지리적 이점이다. 유럽 최대 규모로 재탄생한 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지난 12월12일 열차를 이용하려는 승객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경제의 기본 틀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산업기반의 몰락으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지역경제가 휘청이는 일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경험이 아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한발 앞선 지역혁신을 통해 산업구조 개혁과 균형발전에 성과를 내고 있는 독일·영국·일본의 현장 사례를 세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한번 라이프치히는 영원한 라이프치히. 앞으로, 앞으로.”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약 160㎞ 떨어진 옛 동독 도시 라이프치히. 지난 12월12일 찾아간 작센주 최대 도시의 도심 곳곳에선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다. 1989년 1월 약 500명의 시민이 첫 시위를 벌여 그해 가을 동독 민주화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현장인 옛 시청 앞 ‘시장광장’엔 이맘때 열리는 크리스마스마켓이 한창이었다. 흥겹게 글뤼바인(데운 적포도주)을 마시던 우베와 친구들은 축구 얘기에 바빴다. 삼삼오오 웃음꽃을 피우던 주변 시민들도 일제히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2019~2020시즌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에서 줄곧 1위를 달리는 지역 구단 ‘아르비(RB) 라이프치히’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났다. 10년 전 5부 리그 팀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창단해 연거푸 리그 승격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1부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구단을 제치고 1위 자리를 꿰찬 이 신생 구단의 기세는 라이프치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독일 통일 이후 많은 사람이 등지던 가난한 도시에서 현재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도시로 떠오른 라이프치히의 반전 드라마를 그대로 빼닮아서다.

‘동독 민주화 혁명의 성지’ 자부심에도
독일 통일 이후 인구 20% 이상 급감
전체 제조업 일자리 90%나 사라져

EU의 동유럽 확대로 반전의 계기
아마존·BMW 등 새 거점 유치하고
통합개발전략 세워 클러스터 육성

“10대 도시 중 유일한 동독 거점 도시”
“주거지역 재개발 등 힘써야 할 때”

사회주의 산업도시의 처참한 몰락

라이프치히를 휘감은 활기의 비밀은 무엇일까. 동독 정권을 무너뜨린 ‘월요시위’의 성지 니콜라이교회 근처 그리마이셰 거리에 자리잡은 ‘로지스틱스 리빙 랩’은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실험실처럼 꾸며진 공간에선 무인배송 로봇을 비롯해 드론과 전기자전거 등 다양한 이동수단을 활용한 배송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슈테판 무트케 박사는 “형식상 대학 소속 기관이지만, 운영과 예산에서 정부(공공기금)와 기업(재단), 대학 등 3자의 유기적 협력이 이뤄지는 현장”이라며 “아이디어가 실제 물류 현장에 적용되기까지 걸리는 기간도 상당히 짧은 편”이라고 말했다.

라이프치히 그리마이셰 거리에 자리잡은 ‘로지스틱스 리빙 랩’ 내부에 드론과 전기자전거 등 다양한 이동수단이 전시돼 있다.

라이프치히에 도시혁신의 불씨가 처음 지펴진 건 대략 2000년대 중반. 기껏해야 10년 조금 더 된 과거 일이다. 1990년 갑자기 찾아온 통일은 인쇄, 공작기계, 화학 분야에 특화됐던 사회주의 산업도시에 직격탄을 안겼다. 기존 산업 기반을 그나마 유지했던 드레스덴, 예나 등 인근의 옛 동독 도시들보다 충격은 더 컸다. 경쟁력을 잃은 기업이 줄도산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서독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동독 말기 52만명대이던 인구는 단숨에 20% 이상 줄어들었다. 제조업 일자리 감소율은 무려 90%나 됐고 공식 빈곤선 이하 가구만 30%를 웃돌았다. 통일 이후 10여년이 훌쩍 지나도록 라이프치히라는 이름 앞엔 ‘가라앉는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줄곧 따라붙었다.

‘유럽의 정중앙’…지리적 이점을 살려라

변화의 시간은 찾아왔다. 2004년 동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EU)에 대거 가입한 건 희망의 전주곡이었다. 유럽의 경제 지도가 동쪽으로 크게 넓어지면서 라이프치히의 지리적 이점이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열차로 각각 최대 3시간, 24시간이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이를 수 있는 정중앙에 자리잡은 도시가 바로 라이프치히다. 물류 대기업인 아마존이 2006년 라이프치히에 최첨단 유럽물류센터를 세운 데 이어, 디에이치엘(DHL)도 2008년 그 뒤를 따른 건 이런 이유에서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유럽을 통틀어 최대 규모(바닥면적 기준) 역사로 재탄생했다.

물류산업이 지핀 혁신의 불씨는 자연스레 다른 산업으로 번져갔다. 물류의 영향을 크게 받는 자동차산업이 대표적이다. 완성차 업체인 베엠베(BMW)와 포르셰가 새로운 생산공장 입지로 주저 없이 라이프치히를 선택한 것. 사회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 소유의 넓은 공유지가 남아 있던 요인도 작용했다. 라이프치히 북동쪽 외곽 229만㎡ 넓이의 땅에 20억유로(약 2조7천억원)를 들여 건설된 베엠베 라이프치히공장은 현재 베엠베 전체 공장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공장으로 꼽힌다. 작업 환경과 지속가능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이 공장에선 2011년 이미 누적 생산 대수가 100만대를 넘었고, 2013년부터는 베엠베의 전략 차종인 전기자동차 i3 모델이 생산되고 있다.

5개 클러스터로 산업구조 ‘대수술’

어렵사리 찾아온 반전의 기회를 확실히 살려낸 데는 치밀한 전략의 덕이 컸다. 라이프치히시는 연방정부 및 주정부, 대학과 긴밀한 협력을 맺고 2020년까지의 도시혁신 계획을 담은 ‘통합도시개발전략’(INSEK)을 2009년 5월 확정했다. 슈테판 하이니히 라이프치히시 도시개발국 팀장은 “주거, 고용, 환경, 교통, 교육, 역사 보존 등 모든 영역을 통합적인 발전의 시각에서 접근하자는 의도”라며 “이때부터 5개의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라이프치히 경제를 완전히 재편하는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고 설명했다. 5개 클러스터란 자동차, 물류, 에너지·환경공학, 의료·바이오, 미디어·창조산업을 말한다. 현재 라이프치히 경제를 탄탄하게 떠받치는 다섯개의 기둥이다.

연방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도 디딤돌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연방정부는 최고의 연구 역량을 갖춘 대학이 동독 지역 산업 클러스터의 핵심기관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판단 아래, 15세기 초 독일에서 두번째로 문을 연 라이프치히대학의 현대화를 위해 2억5천만유로(약 4천억원)를 기꺼이 투자했다. ‘이노레기오’(InnoRegio)란 이름으로 진행된 연방정부 차원의 지역혁신 프로그램도 라이프치히 산업 클러스터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

라이프치히 북동쪽 외곽에 자리잡은 베엠베 라이프치히공장은 전체 베엠베 생산공장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공장으로 꼽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겉으로 드러난 성적표는 화려하다. 줄어들기만 하던 라이프치히 인구는 증가세로 돌아서 2019년 현재 60만명으로 늘어났다. 주변 지역을 포함할 경우, 라이프치히를 주된 생활 거점으로 삼는 인구는 110만명에 이른다. 2005~2019년 사이 자동차(114%), 물류(103%), 에너지·환경공학(35%), 의료·바이오(90%), 미디어·창조산업(55%) 등 부문별로 일자리가 고루 늘었다. 2009년에서 2016년까지 시기만 놓고 보면, 지역총생산(RGDP)이 27% 늘어나 독일 전체(17%)는 물론 작센주 평균(22%)보다 증가율이 높다. 지역경제가 살아나면서 같은 기간 세수가 41%나 늘어난 것도 긍정적 신호다.

혁신의 성과…‘2019 올해의 도시’ 선정

이제 라이프치히 앞에는 혁신의 성과를 한 단계 높이는 과제가 놓여 있다. 현재 추세라면 2030년께 도시 인구는 지금보다도 15만명 가까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라이프치히시 경제진흥국의 클레멘스 쉴케는 “일자리와 주거, 교통 등 도시의 밑그림을 새롭게 짠 ‘통합도시개발전략 2030’이 이미 2018년에 확정된 상태”라며 “좀더 부가가치가 높은 신산업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 주거지역의 재개발 등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 당시 라이프치히엔 ‘플라텐바우보눙’이라 불리는 아파트 형태의 열악한 노동자 집단거주시설이 20만채가량 남아 있었고, 이 가운데는 아직껏 리모델링되지 않은 곳도 꽤 있다. 실제로 이날 둘러본 시 남쪽의 코네비츠 지역만 해도 동독 시절에 지어진 채 버려지다시피 한 건물이 자주 눈에 띄었다.

라이프치히 남쪽 코네비츠 지역에 버려진 채 남아 있는 동독 시절의 건물.

그럼에도 라이프치히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독일 전체 인구는 8300만명. 수도인 베를린을 포함해 함부르크·뮌헨·쾰른·프랑크푸르트로 짜인 5대 도시의 틀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하다. 그 뒤를 이어 슈투트가르트·뒤셀도르프·브레멘·하노버 등에 맞서 6위권 순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곳이 바로 라이프치히다. 중요한 건 라이프치히를 빼면 모두 옛 서독 지역 도시들이라는 점. 로지스틱스 리빙 랩의 슈테판 무트케 박사는 “10대 도시 중 동독 지역의 거점 도시는 라이프치히뿐”이라며 “통일 이후의 독일 전체 균형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자체와 연방정부, 대학과 기업이 힘을 모은 라이프치히의 성공 사례는 적잖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라이프치히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도시에 수여하는 ‘유럽 어버니즘 어워드’의 ‘2019 올해의 도시’로 선정됐다. 사진은 시내 중심지 모습.

그래서일까. 라이프치히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도시에 수여하는 ‘유럽 어버니즘 어워드’의 ‘2019 올해의 도시’로 선정됐다. 아마도 급격한 탈산업화의 어두운 과거를 과감한 혁신으로 이겨낸 반전 드라마에 대한 찬사이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힘껏 뛰라는 유럽 사회의 격려와 응원일지 모른다.

라이프치히/글·사진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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