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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8 09:00 수정 : 2020.01.09 11:07

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세종서적 펴냄

때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느 한 곳에선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짓밟히기도 하고, 여전히 지구 곳곳에 빈곤과 질병이 남아 있지만, ‘인류의 진보’라는 큰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복지가 늘어나고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소수자 권리가 점점 더 많이 보장되고 환경보호에 관심이 커지고, 우리나라만 봐도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건강보험 보장과 의무교육 대상이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작업을 하면서 ‘인류는 진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곳곳에서 민주주의 퇴행을 보여주는 이상 조짐이 다수 감지됐다.

2010년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뒤, 미국 41개 주에서는 저소득층과 젊은 유권자의 투표를 제약할 수 있는 법안이 180개 이상 발의됐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보조교사 7천 명이 줄고, 공립학교 예산이 2008년보다 5억달러 이상 감축됐다. 일부 가난한 지역에서는 학생들이 (행여 읽어버릴까봐) 교과서를 집에 가져가지도 못한다.

2011년 스콧 워커 위스콘신주 주지사가 도입한 반노조법으로 위스콘신주 공공부문 노동자는 노동조건과 부가급부를 뺀 채 오직 임금만 협상할 수 있다. 그나마도 인플레이션율에 연동해야 한다. 모든 노동계약도 1년 단위로 바뀌었다. 심지어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판사들이 청소년 수천 명을 소년원에 보내는 대가로 소년원 운영 기업에서 돈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일시적 또는 지역적 흐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주 단위의 움직임은 ‘오바마케어’를 무산하기 위한 전국 규모 운동으로 퍼졌고, 2013년에는 오바마케어 예산을 깎기 위해 정부를 16일간 셧다운(일시적 부분 업무 정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미국 듀크대 역사·공공정책 교수인 저자 낸시 매클린은 연구를 진행하던 중 제임스 맥길 뷰캐넌이라는 경제학자 이름과 마주쳤다. 그가 헌법을 바꾸고 모든 것을 사유화하고 노동조합을 없애고 투표를 제한하려는 미국 극우파 동맹의 설계자였음을 알게 된다. 매클린은 조지메이슨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건물, 뷰캐넌의 문서보관소에 있던 자료를 샅샅이 조사했다. 뷰캐넌이 비즈니스 재벌과 그들이 세운 (학술)기관과 공모해 어떻게 슈퍼리치를 대신해,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숨겨진 ‘극우화 프로그램’을 개발했는지를 확인했다.

뷰캐넌이 이론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인재를 교육하는 동안, 한편에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이 운동의 연료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코크인더스트리 소유주인 억만장자 찰스 코크다. 코크는 뷰캐넌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우익단체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했다. 급기야 자신들 의제에 동참하지 않는 정치인이 있으면 도전자를 내세워 막대한 자금을 퍼붓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또한 급진 우파가 미는 법안이 모든 주의 의회에 들어가게 했다.

뷰캐넌과 코크가 중심이 돼 만들어온 극우파의 전방위적 활동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 동안에도 계속 힘을 키워나가며 조용히 미국을 움직였다. 뷰캐넌을 추종한 마이클 펜스는 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했고, 하원과 상원, 대다수 주정부와 법원에서 ‘급진적 우파 공화당 결사체 성원’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미국 국민이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 미국 민주주의와 생존권은 ‘벼랑 끝’으로 조금씩 밀려났다.

자본과 부의 집중이 나날이 심해지고 빈부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현상, 정치권력보다 기업과 자본 권력의 힘이 더 커지는 현상은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가 공통으로 목도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제단체가 극우단체를 지원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기업이 광고라는 무기를 이용해 언론이 친기업 기사를 양산하도록 하고, 노동조합을 죄악시하는 여론을 만들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에 정치자금을 받고 기업에 가족의 취업을 부탁한 국회의원이 어떤 법을 만들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기업과 자본으로 벌어지는 논란을, 단순히 ‘보수와 진보’ ‘자본과 노동’ 같은 이분법으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우리 후배와 내 아이가 어떤 세상을 맞이할지 고민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그려나가야 해결할 수 있다. 잘못하면 우리는 자본권력의 무자비한 횡포 앞에 민주주의, 평등, 복지, 인권, 노동환경 등 수십 년 동안 힘겹게 얻어낸 소중한 성과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임경훈 세종서적 편집자 calling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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