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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웨스트벵골주 수도 콜카타 거리에 흰색 올빼미 조각상이 등장했다. 이는 정신적 풍요뿐 아니라 물질적 번영도 추구하는 사회 변화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코트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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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인도 웨스트벵골주 주도 콜카타 거리에 흰색 올빼미 조각상이 등장했다. 마하트마 간디부터 카를 마르크스까지 각양각색 동상이 있는 콜카타에 올빼미 조각상이 뭐 그리 특별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이 지역에 더 잘 어울리는 동물이 올빼미가 아닌 백조여서다.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힌두 여신 사라스와티가 타고 다니는 백조는 지식·음악·예술을 상징하는데, 예로부터 이곳에선 학문과 예술 분야에 특별한 인재를 대거 배출했다. 그래서 벵골은 수준 높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찍이 19세기에 시작한 벵골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벵골 지역은 인도 근대화에서 선구지였다. ‘인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람 모한 로이는 무굴제국 황제로부터 라자(왕) 칭호를 받고 영국 런던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티(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는 전통), 조혼 같은 구습을 타파하는 등 종교·사회·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동방의 등불’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역시 벵골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학, 음악, 미술뿐만 아니라 인도 정치사상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벵골어 시집 <기탄잘리>가 서구에서 출판됐고, 동양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기탄잘리 문체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타고르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애국가로 사용한다.
벵골 지역은 자연과학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개발했다. 라디오와 마이크로파 광학 연구에 기여한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는 ‘무선통신 과학의 아버지’로 일컫는다.
종교 분야에서 유명한 힌두 승려 라마크리슈나와 그의 제자 스와미 비베카난다 역시 벵골 출신이다. 39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비베카난다는 현대 인도인이 가장 존경하는 승려다. 그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에서 한 연설은 다른 종교 간 관용과 이해를 촉구해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힌두교를 해외에 알리는 계기도 제공했다.
영화 분야에서도 벵골 지역은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발리우드에 대응하는 톨리우드(Tollywood)로 유명하다. 특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사티아지트 라이는 세계 영화사에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199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다. 그가 1960년대 만든 영화 시나리오를 표절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를 제작했다는 비판도 있다.
벵골 지역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학문적으로 두각을 보여 세계적 인재를 배출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이 대표적이다. 센은 타고르와도 인연이 깊다. 외조부가 타고르의 친구인 덕분에 센은 타고르가 만든 산티니카탄학교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 역시 타고르가 지어줬다. 자기 무릎에 안겼던 아이가 훗날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벨상을 받을 줄은 타고르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센은 일찍부터 가난한 인도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 빈곤 문제 해결, 사회정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는 센과 마찬가지로 콜카타에 있는 프레지던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빈곤 문제 해결 연구로 프랑스인 아내 에스테르 뒤플로 MIT 교수와 함께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아, 벵골인의 긍지를 다시 한번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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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 지역은 30여 년 동안 공산당이 집권해 사업활동이 억압받았다. 타타자동차 유치 시도와 지역주민의 거센 반발로 2011년 공산당 집권이 끝났다.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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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문화·사상·예술 중심지… 경제는 마르와리 주축
벵골인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처럼 큰 두각을 나타냈지만 경제·비즈니스 분야에선 사정이 다르다. 과거 영국 지배 시절부터 벵골 지역은 경제적으로 인도 중심지 구실을 했다. 그 중심에 인도 서부 라자스탄 지역에서 대거 이주한 전설적 상인 계층인 마르와리 상인이 있었다. 벵골인이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고 상업을 천시한 반면, 마르와리 상인은 실사구시 정신으로 금융·무역·산업 등 경제 각 분야를 석권했다. 마르와리 상인은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도 돈만 밝힌다는 이미지로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는 점에서 종종 유대인과 비유된다.
벵골에서 출발해 인도 굴지 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마르와리 기업으로 비를라그룹이 꼽힌다. 과거 영국 식민지 때부터 타타그룹과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비를라그룹은 간디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며, 간디가 생을 마친 곳도 델리에 있는 비를라 저택이다. 해방 이후 일부 마르와리 기업은 콜카타를 떠나 뭄바이 등으로 사업처를 옮기기도 했으나, 현재까지 벵골 지역 상권의 상당수를 마르와리인이 장악하고 있다.
인도가 194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뒤 벵골은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는다. 이슬람교도 인구가 많은 동벵골 지역은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으로 분리됐다. 벵골이 동서로 나뉘면서 산업 간 유기적 가치사슬이 끊기고, 콜카타에는 난민 유입으로 큰 슬럼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콜카타는 인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제·문화 중심 도시였으나 사회불안과 노동분쟁, 공산주의 득세로 주요 기업이 델리, 뭄바이 등으로 빠져나가 산업 공동화 현상을 맞았다.
콜카타가 악명 높은 빈민 도시로 전락한 이유 중 하나인 난민 유입은 이후에도 1971년 방글라데시 분리독립, 1980년대 기근 등으로 확대됐다. 이 상황은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책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에 상세히 묘사됐는데, 롤랑 조페 감독은 1992년 같은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콜카타는 테레사 수녀가 평생 봉사하다 생을 마감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네루-간디 가문 통치 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던 인도는 1991년 나라심하 라오 총리와 만모한 싱 재무장관이 실시한 개혁·개방 경제개혁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뤘다. 2000년대 후반에야 자유시장경제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벵골 공산당 정부는 기업투자 유치를 적극 추진했다. 이에 공산당 정부는 저렴한 가격에 시민이 탈 수 있는 나노자동차를 개발하고, 공장부지를 물색 중이던 타타자동차에 콜카타 외곽 신구르 지역을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농사짓던 주민의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 타타자동차 유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34년 공산당 정권이 몰락했을 뿐 아니라 시위를 주도한 여성 정치인 마마타 바네르지의 트리나물의회당(TMC)이 2011년 정권을 잡았다.
타타자동차가 벵골 지역 공장 설립에 실패하자, 서북부 구자라트주 주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재빨리 나노자동차 공장을 유치했다. 그는 이를 통해 사업친화적인 주총리 이미지를 공고화했고, 결국 2014년 인도 총선에서 자신의 당 BJP를 승리로 이끌며 총리 자리에 올랐다.
서로 모순되는 사회상 공존하는 곳
벵골 지역은 서로 모순되는 사회상이 공존하는데, 인도의 근현대 사회상을 조망하는 축소판인 셈이다. 인도는 아마르티아 센,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자그디시 바그와티, 라구람 라잔 등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경제학자가 넘쳐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천달러에 그치고 13억 인구의 20%가 빈곤선에 머물고 있다. 벵갈루루, 구르가온, 하이데라바드는 IT 산업 발전과 더불어 현대적 건물이 넘쳐나지만, 그 주변부는 여전히 중세시대와 흡사한 생활상을 보인다. 콜카타에서 우버나 올라 앱으로 택시를 탈 수 있지만 아직도 손님을 태운 인력거꾼이 거리를 달린다. 정치·사회적으로 인도는 간디, 네루, 타고르, 암베드카르 같은 높은 이상을 지닌 건국의 아버지들이 국가의 기초를 닦았으나 현재 사회적 편견, 종교적 배타주의, 계급적 차별 등은 더욱 고착되고 있다.
벵골 지역은 30여 년 동안 공산당 집권으로 사업활동이 억압되다 2011년에야 공산당 집권이 종식됐다. 현재 집권 벵골 정부는 국내외 투자 유치를 장려하며, 경제발전이라는 비전을 갖고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마타 바네르지 웨스트벵골 주총리 역시 2011년 집권 이후 지역경제와 주민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후 단 한 건의 노동분규도 일어나지 않았다. 콜카타 뉴타운에는 TCS, 위프로(Wipro), 콩그니잔트(Cognizant) 등 세계적인 IT 서비스 기업이 입주해 수만 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콜카타를 IT 산업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있다.
많은 인도인은 그들이 숭배하는 여신 락슈미가 흰색 올빼미를 타고 다니며 행운과 부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콜카타에 새롭게 등장한 흰색 올빼미 조각상은 어쩌면 정신적 풍요뿐만 아니라 물질적 번영도 추구하는 벵골 지역의 변화하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박영선 KOTRA 콜카타무역관 관장
yspark@kotra.or.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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