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6 16:15
수정 : 2019.08.06 21:20
두케 대통령 “어려운 때 외국인 혐오 옳지 않아”
2015년 8월 이후 출생한 아이들에게 시민권 부여
2만4천명 혜택…인권단체 “국제사회 모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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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가운데)이 5일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베네수엘라 난민 자녀 2만4천여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보고타/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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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인 오스마리 셈플린(18)은 출산을 앞두고 고향 마라카이보를 떠나 이웃 나라 콜롬비아로 향했다. 의약품 등이 귀해진 베네수엘라에선 출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셈플린은 가족들이 모아준 돈을 들고 친척이 살고 있는 보고타로 와 지난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생후 2개월 열병을 앓더니 몇달 뒤엔 얼굴과 눈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셈플린은 공짜로 제공되는 응급치료 외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수 없었다. 아들이 ‘무국적’인 탓에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경우, 자국에서 태어난 아이라 해도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콜롬비아인이거나 합법적인 체류 자격이 있어야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단교를 하면서 콜롬비아 내 베네수엘라 영사 업무도 중단된 상황이라 베네수엘라 국적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5일 셈플린을 비롯해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콜롬비아로 온 베네수엘라 난민들의 사정을 전하며, 앞으로 셈플린의 아들 같은 무국적 난민 아이들이 각종 교육·의료 보건 서비스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날 콜롬비아 정부가 2015년 8월 이후 자국에서 태어나고 이에 더해 향후 2년 동안 태어날 베네수엘라 난민 자녀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극심한 경제난과 이에 따른 사회 혼란이 지속되면서 지금까지 400만명 이상의 베네수엘라인이 생존을 위해 고국을 등졌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150만명이 현재 콜롬비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처로 콜롬비아 국적을 얻게 될 아이들의 수는 대략 2만4천여명이다. 콜롬비아 정부는 앞으로 2년 동안 이 조처를 시행해본 뒤 연장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콜롬비아 정부의 이번 조처를 두고 인권단체 등에선 난민 보호에 대한 ‘국제법상 의무 준수의 모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 각국 정부가 전쟁 난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에 대해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등 반이민 정책을 확대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네수엘라의 사정이 열악하다곤 해도 콜롬비아 역시 1인당 국민소득이 8천달러에 못 미치는 등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물론 베네수엘라 출신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가 콜롬비아의 식민 해방 전쟁을 도와준데다, 1964년 콜롬비아 내전 당시 베네수엘라가 콜롬비아 난민을 받아줬던 고마운 역사적 경험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좌파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두 나라가 사사건건 대립하며, 국교 단절에까지 이른 상태였다.
이반 두케 대통령은 “콜롬비아 국민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은 옳은 길이 아니며, 인류애 수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베네수엘라 난민 문제는 최근 국제사회의 주목할 만한 인도주의적 위기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중남미 35개국이 참여한 미주기구(OAS)는 2020년이면 베네수엘라 난민이 시리아 난민(670만명) 수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미주기구는 시리아 난민에 대한 국제적 지원금이 한때 1인당 5천달러에 달했지만, 베네수엘라 난민에 대한 지원금은 1인당 100달러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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