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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5 19:34 수정 : 2005.04.25 19:34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이스라엘 대통령을 지낸 에제르 바이츠만이 24일 이스라엘 해안도시 케사레아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80.

바이츠만 전 대통령은 2달 전 폐렴으로 입원했다 퇴원한 지 1주일 만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을 달리했다고 이스라엘 정부는 전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낸 주역이자, 1978년 이집트와의 평화 협상을 주도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은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그의 인생은 반세기 이스라엘 역사의 궤적과 함께 했다.

1924년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등을 낳은 유명 시오니스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차대전 동안 영국공군에 입대해 활약한 뒤 종전과 함께 이스라엘 공군 창설에 뛰어들었다. 1967년 선제공격으로 사실상 6시간 만에 중동전쟁을 끝내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77년 이스라엘 우파 정당 리쿠드 당의 선거 참모로 활동해 노동당의 29년 장기 집권을 끝내는 데 일조한 뒤 국방장관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때부터 그는 ‘강경 매파’라는 꼬리표를 떼고 평화적 협상을 중시하는 ‘비둘기파’로 변신해 논란과 함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90년에 이스라엘 정부의 허가 없이 야세르 아라파트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리쿠드 당 당적을 박탈당했으나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98년에도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거부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마찰을 빚었으나, 대중적 인기가 높아 지지율이 70%대에 이르렀다.

하지만, 2000년엔 프랑스 기업체로부터 거액을 받은 혐의로 3년 임기를 앞두고 스스로 물러났다. 대통령인 그에게 조종사 훈련 기회를 달라는 여성에게 “뜨개질로 짠 양말을 신은 남성을 보았는가? 여성 외과전문의나 여성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보았냐”며 거절한 일화도 여전히 회자된다.

강김아리 기자, 외신종합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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