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6 18:33
수정 : 2017.12.1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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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시위대가 5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서안지구 베들레헴의 만제르 광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불태우고 있다. 베들레헴/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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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및 친이스라엘 세력 겨냥한 조처
취임 이후 잇따른 국제 합의 파기 연장선
미-사우디-이스라엘 관계 밀착에서 배태
‘팔’에는 ‘예루살렘 교외지역 약속’ 소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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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시위대가 5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서안지구 베들레헴의 만제르 광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불태우고 있다. 베들레헴/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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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어코 중동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말았다. 고질적인 중동 분쟁에서도 최대 화약고인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묵계’를 깼다. 중동 정세가 낭떠러지 앞에 서게 됐다.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이런 조처를 트럼프가 감행한 것은 그가 계속 보여준 국제사회 합의들의 일방적 파기 조처의 연장선이다. 그는 취임 이후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파기 및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탈퇴 위협 등 다자무역협정 파기 시도, 이란과의 국제 핵협정 파기 위협 등을 거침없이 해왔다. 자신을 지지하는 국내 산업 쇠락 지역의 보수적 백인 유권자들을 겨냥한, 정치적 이익을 따진 행동이다.
이번 결정 역시 그를 지지하는 핵심 집단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과 보수적 유대계 유권자들을 위한 조처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때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공약은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한테 큰 호응을 얻었고, 카지노 재벌인 셸던 애덜슨 같은 친이스라엘 지지자들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취임 뒤인 지난 6월엔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규정한 법 시행을 유예했다. 이에 복음주의 세력들은 크게 반발했다. 미국은 1995년에 대사관을 예루살렘에 둔다는 법 규정을 만들었으나 그 시행은 6개월 단위로 계속 유예해왔다.
트럼프는 최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을 수사하는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수사로 궁지에 몰리자, 지지자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정치적 행위들을 잇따라 터뜨리고 있다. 최근 트위터에 무슬림 혐오를 조장하는 영국 극우세력의 동영상을 올려 영국 총리와 충돌하는 등 큰 국제적 비난을 샀다. 하지만 지지층은 더욱 공고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번 결정이 몰고 올 파장이다. 전세계 무슬림들을 분노하게 만들 이번 조처는 그가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을 내세워 추진하던 포괄적인 아랍-이스라엘 평화협상안을 좌초시키고 중동 전역에서 반미 움직임을 격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번 조처가 중동 평화협상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이번 결정에서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지위 결정이나 영역, 혹은 주권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며 “예루살렘의 성소와 다른 민감한 문제와 관련한 현상을 바꾸지 않는다”고 옹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또 쿠슈너가 주도하는 평화협상안이 진척되고 있고, 이번 결정도 아랍국가들의 암묵적 양해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팔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는 사우디아라비아 쪽은 팔레스타인 쪽에 예루살렘 문제가 포함된 평화협상안 수용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을 인정하고, 동예루살렘 교외인 아부디스를 팔레스타인 수도로 받아들이라는 ‘협상안’이라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서안지구 내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인정하는 대신에 서안지구 밖 예루살렘 인근 땅을 얻는 것이다. 쿠슈너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이 협상안을 주도한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번 조처는 이란에 맞서 밀착해온 미국-사우디-이스라엘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이 갖는 의미를 고려하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는 트럼프의 도박을 사우디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사우디 왕실의 일방적 독주로 불만에 찬 근본주의 성향의 와하비즘 성직자들에게도 이 문제는 타협 불가다. 시아파 이란의 영향력 강화에 부심하는 사우디 왕실로서는 이번 조처를 그대로 묵과하면 수니파 무슬림들의 반발에 직면해 영향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주의 무장집단들도 기존 아랍정권과 미국에 대한 투쟁 명분 강화의 기회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대사관이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면 이스라엘과 단교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처는 미국이 중동에서 수십년간 펼쳐온 정책을 뒤집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트럼프가 여는 중동의 판도라 상자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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