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03 16:52
수정 : 2018.04.03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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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가 전남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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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부인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상징
‘마마’로 불리며 칭송받아…폭력과 부패 사건 재판받기도
14일 국장 치러…라마포사 대통령 “정의와 평등 수호”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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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가 전남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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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1918~2013)의 전부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82)가 2일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위니 만델라가 요하네스버그의 넷케어 밀파크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가족들은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지배계급의 흑인 차별 정책)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위대한 상징 중 한 명”이라며 “남아공의 자유를 위해 삶을 희생했다”고 애도했다.
1936년 동케이프에서 태어난 그는 병원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22살 때 버스정류장에서 변호사이던 넬슨 만델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58년 결혼했다. 38년간의 결혼생활에서 두 딸을 낳았고, 결혼생활 대부분을 차지하는 27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정계에 입문한 그는 남편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외국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남아공의 현실을 전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산하에 여성동맹을 창립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위니 만델라가 출소한 넬슨 만델라의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모습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결정적 장면으로 꼽힌다. 이때 붙은 ‘마마’라는 별명은 지금도 쓰인다. 넬슨 만델라와는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96년에 이혼했다.
아프리카 밖에선 만델라의 아내로 유명했지만, 남아공에선 인종차별 정권에 맞선 상징이자 흑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다. 2007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로 복귀한 그는 반이민 폭력 문제를 앞장서 비판했다. 데즈먼드 투투 남아공 대주교는 “그의 용기 있는 도전은 여러 세대에 걸쳐 큰 영감을 줬다”고 했다. 2011년 9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남아공의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우분투상을 받았다.
강인한 여성 리더십을 보였지만 폭력과 부패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1988년 자신의 경호팀이던 ‘만델라연합축구클럽’이 소년 운동가 스톰피 세페이 등 4명을 납치하고 세페이를 살해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재선 의원 시절이던 1999년에는 은행 대출과 관련된 사기 등에 가담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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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빅터 감옥에서 출소한 넬슨 만델라(왼쪽)와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가 손을 번쩍 들고 시민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케이프타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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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위니 만델라는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했고, 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어줬다”며 “착취에 맞서 정의와 평등을 수호했다”는 애도 성명을 냈다. 남아공 정부는 14일 국장으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예정이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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