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사태 선포로 주가 폭락·페소화 ‘흔들’
오랜 침체 벗고 막 날아오르려던 참인데…
“정부 신뢰 깨져…암흑 시대 올까 무섭다”
비상사태까지 선포된 필리핀의 정국 불안이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필리핀 경제에 찬물을 끼얹을 것인가?지난 24일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 뒤, 회복 조짐을 보이던 필리핀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날 필리핀 증시는 주가지수가 한 때 2%까지 폭락하고, 페소화 가치도 전날 달러당 51.66페소에서 52.20페소로 급락했다. 페소화 하락 폭은 2002년 6월 이후 가장 크다.
요동치는 필리핀 경제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은 27일 “갑작스런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최근 좋은 ‘성적’을 보인 필리핀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필리핀의 한 증권회사 간부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일로 정부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며 “‘암흑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탄탄한 경제를 자랑하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1170달러(2005년)에 불과한 대표적 빈국으로 전락한 필리핀 경제는 최근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여 왔다. 2002년 2110억페소(3조9천억여원)에 이르던 국가재정 적자는 지난해 1470억페소(2조7천억여원)까지 줄었고, 지난해 12월 수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6.8% 증가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외국인직접투자와 조세개혁으로 경제를 일으켜 2008년에는 국가재정을 흑자로 반전시키겠다는 공언까지 한 상태다.
지난해 9~10월 달러당 56페소를 웃돌던 페소화 가치는, 해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송금 등에 힘입어 이달 들어 51페소대까지 높아졌다. 예산의 3분의 1을 국가부채의 이자를 갚는 데 써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페소화 가치의 상승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치적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
2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 하야 요구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한 대학생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의미하는 문구를 입에 붙인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닐라/AP 연합
|
그러나 정국 불안은 갈길이 먼 필리핀 경제에 회의를 품게 만들고 있다. 1986년의 ‘피플 파워’는 필리핀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가져다 줬지만, 1987년 29억8천만달러이던 국가부채는 2003년 62억7천만달러로 불었다. 8600만명 인구 중 3분의 1이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패와 정치 불안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은 떠나고, 인재들도 필리핀을 등지는 현상이 계속됐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36%만이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몰아낸 게 잘한 일이라고 답하는 등, 국민들 사이에 체념의 시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응답자들이 3분의 1 이상이 “기회만 되면 이민을 가고 싶다”고 답했다.
정부가 27일 국가비상사태를 연장할 수도 있다고 밝힌 가운데, 이날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아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페소화 가치도 달러당 51.99페소로 다시 올랐다. 그러나 필리핀 의회가 이번 조처의 적법성을 다투겠다고 벼르는 등, 파장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정치 불안과 사회경제적 불만이 언제든 악순환의 고리를 다시 작동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여전하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