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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8 20:37 수정 : 2019.08.19 11:32

18일 오후(현지시각)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송환법에 반대하고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도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집회는 홍콩 대규모 도심 시위를 주도했던 민간인권전선 주도로 열렸다. 홍콩/연합뉴스

70일 맞은 ‘반송중 시위’ 르포
빗발치는 “자유·민주주의”…
다시 ‘우산’ 펼쳐든 홍콩 시민들
빅토리아공원 가득 채워
중국군 투입설에도 열기 안 식어

“경찰폭력 도 넘어…람 장관 나오라”
“군 무력개입? 결말은 중국도 알아”
“이제는 진실과 거짓의 싸움 됐다”
빗줄기에도 남녀노소 인파로 가득

2014년 ‘우산혁명 패배’ 재현 막으려
11주차에도 시위 고삐 늦추지 않아
‘선 넘은’ 과잉진압도 열기 기름 부어

18일 오후(현지시각)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송환법에 반대하고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도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집회는 홍콩 대규모 도심 시위를 주도했던 민간인권전선 주도로 열렸다. 홍콩/연합뉴스
민간인권전선(홍콩 시민사회 연대 단체)이 주최한 주말 대규모 집회를 3시간여 앞둔 18일 오전 11시께 홍콩 도심 한복판 빅토리아 공원에 갑자기 비가 뿌렸다. 공원 한쪽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람수이호이(54)는 이번 반송중 집회 참석이 처음이라고 했다. “경찰 폭력이 도를 넘었다. 지난 70일 동안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팻말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함께 온 부인 첸킷만(49)은 ‘위안랑 사건’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지난 7월21일 지하철 위안랑역에서 흰색 셔츠 차림의 괴한들이 귀갓길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한 ‘백색테러’는 홍콩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거라고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다. 더구나 경찰이 폭력을 휘두른 ‘흰색 셔츠’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 참을 수 없었다.” 부부는 홍콩 북부 ‘신계’에 산다고 했다. 중국 선전만에서 다리만 건너면 금방 닿는 접경지대에 있다. 지난주부터 장갑차까지 동원해 선전에 진을 치고 있는 중국 인민무장경찰은 “차로 10분이면 홍콩”이라고 을러대며 무력개입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두 사람은 “원했다면 벌써 왔을 거다. 그저 겁을 주려는 거다. 중국군이 들어오면 홍콩은 ‘끝’이다. 중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200만명은 충분치 않다고 하더라. 우리도 힘을 보태고 싶어 일찌감치 나왔다”고 했다.

홍콩 ‘반송중’(중국 송환 반대) 시위가 11주차로 접어들었다. 70일째다. 6월9일 홍콩 시민 100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작된 반송중 시위가 이렇게 오래갈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군 투입 임박설까지 나돌고 있지만, 시위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갈림길에 접어든 반송중 시위는 ‘패배’로 끝난 2014년 우산혁명을 넘어설 수 있을까?

집회 시작이 가까워지면서 공원 들머리 지하철 틴하우역 주변은 불어난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오후 3시10분께 빗줄기가 굵어졌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장대비 속에 우산을 받쳐 들고 “홍콩인, 힘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집회 시간을 넘겨서도 인파는 줄어들 줄 몰랐다. 공원 주변 코즈웨이베이부터 노스포인트까지 4개 전철역마다 검은 옷의 시민들이 끝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틴하우와 포트리스힐 역에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들로 역사가 가득 차면서 무정차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으로 집회 장소를 제한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정부청사가 몰려 있는 애드미럴티와 센트럴을 향해 행진이 시작됐다. 끝없이 이어진 우산 행렬이 거대한 물줄기처럼 홍콩 도심을 흘렀다. 일찌감치 어둑해진 거리에 함성이 가득했다. 검은 셔츠를 입은 청년들의 등에 자그마한 스티커가 붙어 있다. “때릴 테면 때려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홍콩 도심인 센트럴에 도착한 시위대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해산을 시작했다.

민간인권전선은 이날 집회 뒤 도심 행진을 계획했지만, 홍콩 경찰 쪽은 ‘안전’을 이유로 행진을 불허했다. 인권전선은 “빅토리아 공원이 가득 차면 주변 도로까지 집회 허가 지역을 확대하기로 경찰 쪽이 약속했다”며 “단 1명이라도 더 참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시위 참가 인원은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1967년 홍콩 폭동을 아는가?” 금융업을 한다는 조웡(52)은 불쑥 질문부터 했다. “당시 친중파의 지원을 받은 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나섰다. 영국 식민당국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조웡 역시 이날 처음 집회에 참석했다. 그에게도 ‘중국군 투입설’에 대해 묻자, “왜 두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게 중국의 목적이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왔다”고 했다. 2014년 우산혁명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홍콩 행정장관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원칙을 밝힌 ‘8·31 선언’이 도화선이었다. 직선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민주화를 요구하며 홍콩 도심을 79일 동안 점거했지만, 당시 시위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철저한 패배였다. 이후 홍콩 시민사회는 긴 침묵에 빠졌다. 반송중 시위 시작 전까지 홍콩 시민사회 내부에서조차 ‘범죄인 인도 조례’를 불복종 운동으로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패배감을 떨쳐낸 시민들은 100만명(6월9일), 200만명(6월18일)씩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14년 이후 중국 중앙정부의 홍콩에 대한 간섭과 개입은 더욱 노골화했다. 조례 제정은 그 상징이었다. 지난 6월15일 홍콩 정부가 조례 추진 중단을 선언했음에도, 시민들은 △조례 공식 철회 △폭도·폭동 규정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 사임 등을 요구하며 시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경찰의 과잉진압도 시위 열기에 계속 기름을 붓고 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친다는 아델리나 찬(34)은 마카오에서 ‘원정 시위’를 왔다. 마카오 사정을 묻자 “조용하다. 집회 시위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일이 됐다”며 “홍콩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서 왔다”며 쓰게 웃었다.

찬은 2014년 우산혁명 때도 원정 시위를 왔다고 했다. 그는 “그때는 막판에 시민 참여가 부쩍 줄었다. 반송중 시위는 양상이 다른 것 같다. 2014년의 경험 때문일까? 그때 포기했던 정치개혁 요구까지 다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제적 번영과 안정감이 중국 정부가 주는 ‘뇌물’이다. 중국 본토에서도, 마카오에서도 통했다. 그렇게 길들여지는 거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홍콩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공원 주변이 검은색 옷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홍콩/정인환 특파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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