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과 교수 옛 공산국가였던 헝가리·폴란드 등 몇몇 유럽연합(EU) 국가에서 최근 사회적 보수주의가 비등하고 있어 이목을 끈다. 이들 국가에서 민족주의 정당의 잇따른 선거 승리는 보수적인 정통 가톨릭 교리와 전통적 가족·성별 역할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정책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일부 국가들이 최근 사회적 자유주의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또다른 유럽연합 국가인 아일랜드는 사회적 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대표하는 사례다. 과거 에이먼 데벌레라 전 아일랜드 대통령은 1943년 성 패트릭 축일에 한 유명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사회적 보수주의 비전을 표방했지만, 이는 현재는 더 이상 반향을 불러오지 못한다. 당시 데벌레라가 강조한 독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보호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 이념은 그 후에 자유주의 가치가 더해진 좀더 개방주의적인 것으로 대체돼왔다. 아일랜드의 1937년 헌법은 정통 가톨릭교회 교의에 기초한 것으로, 그 후 아일랜드의 각종 사회문제를 다루는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노엘 브라운 아일랜드 보건장관이 자녀를 둔 어머니와 16살 이하 어린이에 대한 무상의료 혜택을 추진했으나 가톨릭 위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거부로 좌초됐다. 가톨릭이 맡아온 복지 제공 역할이 훼손되고, 특히 가톨릭 교리에 위반되는 가족계획(피임)과 낙태를 허용하라는 대중적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브라운의 개혁 구상은 가톨릭교회의 강도 높은 반대에 부딪혀 끝내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점차 추락하면서 아일랜드에서도 사회적 자유주의가 다시 부상해왔다. 다수의 아일랜드 시민이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따르지만 교회 참석률이 점점 줄어들고 종교적 교의를 준수하는 태도도 약화되고 있다. 고위 성직자들의 잇따른 어린이 성추행 연루, 싱글맘 등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 운영조직의 가혹한 처우 등으로 교회에 대한 신뢰 역시 떨어지고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불러온 또다른 요인으로 꼽히는 건 아일랜드가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면서 더욱더 국제적인 시야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점증하는 개인주의, 페미니즘의 성장, 문화적 다양성, 적극적인 정치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최근 일련의 법률적 진보개혁 조처들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 (절차가 복잡하고 조건이 엄격해 사실상 금지돼온) 이혼제도 개혁의 경우, 1983년에는 이혼 합법화를 촉구한 그룹이 가톨릭교회의 일치된 반대 캠페인으로 인해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바 있다. 하지만 이혼 지지자들이 국민투표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는 반전이 1995년에 일어났다. 낙태 합법화도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했다. 아일랜드 제8차 개정 헌법은 1983년 국민투표로 발효됐는데 태아의 생명권도 모성 생명권과 동등하게 부여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들어가 있었다. 이 규정은 생명 존중 태도를 가진 수많은 사람의 승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유럽과 유엔 기구에서 강도 높은 비판적 보고서가 잇따르면서 ‘선택할 자유’를 주장하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2017년 아일랜드 시민의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이 의회는 임신 12주까지는 제한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치명적 태아 기형이 발견되면 허용 기간을 더 늘려주는 규정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찬반 논란 끝에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낙태 합법화에 찬성했다. 동성결혼 입법화에서도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동성결혼은 2015년 국민투표에서 승인돼 그해 결혼법에 명시됐다. 아일랜드에서 사회적 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놀라운 일이지만, 변화의 방향은 기존 문화적·역사적 요인뿐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경제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한 국가가 사회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경로를 채택했다고 해서 장래에 사회적 보수주의가 재등장할 가능성이 배제되는 건 아니다.
유럽 |
[세계의 창] 사회적 진보 추구하는 아일랜드의 길 / 로버트 페이지 |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과 교수 옛 공산국가였던 헝가리·폴란드 등 몇몇 유럽연합(EU) 국가에서 최근 사회적 보수주의가 비등하고 있어 이목을 끈다. 이들 국가에서 민족주의 정당의 잇따른 선거 승리는 보수적인 정통 가톨릭 교리와 전통적 가족·성별 역할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정책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일부 국가들이 최근 사회적 자유주의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또다른 유럽연합 국가인 아일랜드는 사회적 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대표하는 사례다. 과거 에이먼 데벌레라 전 아일랜드 대통령은 1943년 성 패트릭 축일에 한 유명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사회적 보수주의 비전을 표방했지만, 이는 현재는 더 이상 반향을 불러오지 못한다. 당시 데벌레라가 강조한 독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보호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 이념은 그 후에 자유주의 가치가 더해진 좀더 개방주의적인 것으로 대체돼왔다. 아일랜드의 1937년 헌법은 정통 가톨릭교회 교의에 기초한 것으로, 그 후 아일랜드의 각종 사회문제를 다루는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노엘 브라운 아일랜드 보건장관이 자녀를 둔 어머니와 16살 이하 어린이에 대한 무상의료 혜택을 추진했으나 가톨릭 위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거부로 좌초됐다. 가톨릭이 맡아온 복지 제공 역할이 훼손되고, 특히 가톨릭 교리에 위반되는 가족계획(피임)과 낙태를 허용하라는 대중적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브라운의 개혁 구상은 가톨릭교회의 강도 높은 반대에 부딪혀 끝내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점차 추락하면서 아일랜드에서도 사회적 자유주의가 다시 부상해왔다. 다수의 아일랜드 시민이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따르지만 교회 참석률이 점점 줄어들고 종교적 교의를 준수하는 태도도 약화되고 있다. 고위 성직자들의 잇따른 어린이 성추행 연루, 싱글맘 등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 운영조직의 가혹한 처우 등으로 교회에 대한 신뢰 역시 떨어지고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불러온 또다른 요인으로 꼽히는 건 아일랜드가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면서 더욱더 국제적인 시야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점증하는 개인주의, 페미니즘의 성장, 문화적 다양성, 적극적인 정치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최근 일련의 법률적 진보개혁 조처들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 (절차가 복잡하고 조건이 엄격해 사실상 금지돼온) 이혼제도 개혁의 경우, 1983년에는 이혼 합법화를 촉구한 그룹이 가톨릭교회의 일치된 반대 캠페인으로 인해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바 있다. 하지만 이혼 지지자들이 국민투표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는 반전이 1995년에 일어났다. 낙태 합법화도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했다. 아일랜드 제8차 개정 헌법은 1983년 국민투표로 발효됐는데 태아의 생명권도 모성 생명권과 동등하게 부여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들어가 있었다. 이 규정은 생명 존중 태도를 가진 수많은 사람의 승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유럽과 유엔 기구에서 강도 높은 비판적 보고서가 잇따르면서 ‘선택할 자유’를 주장하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2017년 아일랜드 시민의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이 의회는 임신 12주까지는 제한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치명적 태아 기형이 발견되면 허용 기간을 더 늘려주는 규정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찬반 논란 끝에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낙태 합법화에 찬성했다. 동성결혼 입법화에서도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동성결혼은 2015년 국민투표에서 승인돼 그해 결혼법에 명시됐다. 아일랜드에서 사회적 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놀라운 일이지만, 변화의 방향은 기존 문화적·역사적 요인뿐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경제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한 국가가 사회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경로를 채택했다고 해서 장래에 사회적 보수주의가 재등장할 가능성이 배제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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