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4 09:58
수정 : 2019.12.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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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 의회에서는 ‘남녀동수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 내부. 채혜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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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⑪모든 영역에 ‘여성할당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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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 의회에서는 ‘남녀동수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 내부. 채혜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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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일의 한 방송사에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시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리포터는 독일 닥스(DAX)지수에 포함된 상위 30개 기업 중 여성 이사가 2명 이상 있을 것 같은 곳을 고르라고 했다. 리포터가 들고 있는 카드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 자동차제조업체 폴크스바겐과 베엠베(BMW), 제약회사 바이엘,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이 적혀 있었다.
설문에 응한 시민 의견은 남녀 차이를 보였다. 한 남성은 “독일은 남녀평등사회이니 대부분 기업에 여성 이사 2명 정도는 있을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답했지만, 다른 여성은 “아디다스 정도만 여성 이사가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하지만 여성 이사가 2명 이상인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독일 기업 이사진은 평균 7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대부분 기업의 여성 이사는 1명에 그쳤다. 상위 30개 기업 중 여성 이사가 한 명도 없는 기업도 8곳이나 됐다.
독일 상장기업의 이사회는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나뉘는데, 2016년부터 ‘기업 내 여성 고위직 30% 할당제’가 시행돼 감독이사회의 여성 비율은 대부분 30%를 넘겼지만, 경영이사진 중 여성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 내 낮은 여성 고위직 비율 외에도 독일은 정치, 문화, 미디어 등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여성 비율 자체가 낮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독일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결과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독일이 꺼내 든 열쇠는 ‘여성할당제 도입’이다.
‘미투(#MeToo) 운동’ 이후 영화와 미디어 분야에서는 적극적으로 여성할당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움직임에 앞장선 것은 영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프로 크보테 필름’(Pro Quote Film)이다. 이들은 감독과 연출, 카메라, 사운드, 제작, 대본, 디자인 등 모든 영화 제작 분야에 50% 여성 할당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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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감독 할당제 시행을 위해 2014년 조직된 ‘프로 크보테 레지’ 회원들. 프로 크보테 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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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영화산업 내 성별 불균형 문제는 심각한 상태다. ‘프로 크보테 필름’ 자료를 보면, 여성 감독 비율은 21%, 제작 분야는 14%, 카메라 촬영 분야는 10%에 그치고, 사운드 분야의 여성 비율은 4%에 그쳤다. 영화 각본·시나리오 분야 여성 비율도 23%밖에 되지 않았다.
최근 독일 정치 영역에서는 ‘여성할당제’를 넘어 남녀 비율을 같게 맞추는 ‘남녀동수법’ 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녹색당, 사회민주당, 좌파당 등 여러 정당에서 자발적으로 여성할당제를 운영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독일 연방의회는 2017년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 비율이 19년 전보다도 낮은 31%(총 709석 중 218석)를 기록했다.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 가면 상황은 더 나쁘다.
이처럼 독일의 많은 영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성할당제’가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을 위해 어느 정도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부와 민간단체, 연구기관 등이 긴밀히 협력하고, 정부의 할당제 시행 의지가 강한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 언급한 방송사 설문조사에서 독일 상위 30개 기업 중 2명 이상 여성 이사를 둔 기업이 한 곳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설문 이전과 마찬가지로 남녀가 보인 반응이 많이 달랐다. 설문에 응하기 전부터 결과를 긍정적으로 전망하지 않았던 여성들은 ‘그렇지 뭐’ 정도의 반응이었다면, 남성들은 꽤 놀라는 모습이었다. 놀라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독일 페미니즘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독일은 남녀가 평등한 사회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 독일 사회의 현실을 답해주면 질문자가 보이는 그 표정이었다.
4년 가까이 유럽 페미니즘 영역에서 일하며 새삼 깨닫는다. 남녀평등 사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국가별 정도의 차이와 ‘우리나라 정도면 남녀 평등한 사회’라 여기는 시민들의 착각이 있을 뿐이다.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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